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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Nov 22. 2023

우리는 더 오래 더 정겹게 만날 겁니다

관계의 이합집산, 떠날 이 2편

 이별에 관해 이렇게 오래 이렇게 깊이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느닷없이 가을 들어서고 난 뒤부터 매일매일 이별을 생각합니다. 정나미 떨어져 그만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매일매일 이별을 생각합니다. 극복하고 싶어서요. 이별에 대한 모든 부정적인 관념들을 극복하고 이별을 다만 군더더기 하나 없는 순리로 여기고 싶습니다. 떠나는 이를 함부로 혹평하지 않고 남겨지는 이를 섣불리 연민하지 않고 싶습니다. 여름이 지나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그저 자연의 일이고 저 언덕을 떠난 홀씨가 내 발치로 날아오는 것이 그저 자연의 일이듯 사람과 사람이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것도 그저 자연의 일로 여기고 싶습니다. 그러면 내가 정말로 자유로워질 것 같습니다. 내 발목을 틀어쥐고 있는 것들 대부분이 관계의 성패에 대한 내 미련인 까닭입니다.  


 실제로는 승리하는 관계도 패배하는 관계도 없는데 나는 헛것을 두고 미련을 가졌습니다. 그러니 실은 다른 무엇도 아닌 내가 나를 옭아매고 있었던 겁니다.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낯선 얼굴이 아는 얼굴이 되었다 다시 낯선 얼굴이 되는 일에 새로운 이름, 이 뜻도 되었다 저 뜻도 되었다 하는 이름 말고 하나의 훌륭한 진리만 지닌 이름을 붙이고 싶습니다. 우리 그 이름을 같이 지어 볼까요. 그 이름을 다 짓고 나서는 서로 잠시 서먹하게 있어 볼까요. 마음만 먹으면 내일 또 만날 수 있는 사람들 말고 당장이라도 남남이 될 수 있는 사람들처럼 멀찍이 앉아 있어 볼까요. 사실 우리는 정말 그런 사람들이니까요. 오늘이라도 헤어질 수 있는 사람들. 극단적인 예를 들어 보자면 우리 둘 중 하나가 1시간 뒤에 죽어 없어질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나는 그런 걸 생각하는 일로 나도 당신도 슬퍼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차피 모두가 죽습니다. 불길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누구나 죽어서 모두를 떠납니다. 누가 죽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에게서 사라져 버리는 일은 너무 범상합니다.  


 어떤 일로 당신과 나 사이에 깊숙한 균열이 생기면 우리가 더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관계의 밀도를 불신하는 게 아닙니다. 불확실한 미래를 그냥 받아들여 보자는 겁니다.  


 어떤 날 어떤 흉한 일이 일어나 모든 것들이 끝나 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은 어떤 면에서 긍정적인 생각입니다. 그 생각을 하다 보면 불현듯 현재로 돌아와 아직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지금 이곳의 것들을 돌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을 살 수 있다는 착각에서 깨어나면 미루기만 했던 일들을 당장 실천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충실히 고려하다 보면 삶이 저절로 눈을 뜹니다. 마찬가지로 이별을 가만가만 사색하다 보면 관계가 저절로 눈을 뜹니다. 눈을 뜨고 현재 속에 우뚝 섭니다.  

 

 해가 지네요. 3시간 동안 한 자리에 앉아 이별을 숙고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만날 줄 몰랐듯 언젠가 뜻밖의 순간 속에서 우리는 헤어질 겁니다. 그 뜻밖의 순간이 언제인 줄 모른다는 사실을 잘 사용하면 이별을 극구 외면하는 사람들보다 우리는 더 오래 더 정겹게 만날 겁니다.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이유로 포기하는 사람이 있고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일단 시도해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죽는 날까지 내가 후자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온 인생이 미지인 까닭입니다. 모르니까 안 한다는 말로 갈 수 있는 곳이 실은 아무데도 없는 까닭입니다.

 

 모두가 모두를 불시에 떠나는데 이 긴 세월 동안 당신은 내 곁에 남아 있었습니다. 불확실한 하루하루를 당신이 확실한 마음으로 하나하나 연결해 왔으니 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요.


 아직 우리에게 오늘이라는 시간이 남았으니 이 또한 얼마나 복된 일인가요. 내일은 아무도 모르지만 오늘은 우리 손 안에 떨어져 있습니다.  


 모처럼 현현히 깨어 있는 마음으로 당신에게 말합니다. 고맙습니다. 또 고맙습니다.  




박이로운


1992년 출생. 문학서와 인문서를 주로 발간하는 어떤 마음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까지 약 70여 권의 책을 출간하였다. 영남대학교 환경보건대학원에서 미술치료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마음을 건강하게 다루며 살아가는 일, 소외된 이들의 서사를 들리는 목소리로 바꾸는 일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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