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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Dec 06. 2023

그 사람의 좋고 싫음과 고루 함께하는 일

관계의 이합집산, 합할 합 2편

 누군가와 진정 함께한다는 건 그 사람의 호오好惡와 함께하는 일입니다. 그 사람의 좋고 싫음과 고루 함께하는 일. 내가 좋다고 할 때만 내 곁에 있는 사람은 나에게 반절의 마음만 주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완전한 하나의 마음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걸 무용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나이 들수록 예쁘게 치장된 것들만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 안에 머무르는 일이 더 고통스러워지네요. 진실하게 헤어지는 일이 가식으로 동행하는 일보다 훌륭해 보이고요.


 잘 모르겠습니다, 이 변화가 어디에서 기인해 어디까지 나를 이끌어 갈지. 다만 다정한 진정성이 발현된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크나큰 흡족감을 느끼는 나를 번번이 알아차릴 뿐입니다.  


 오늘날 나에게 다정한 진정성은 내가 관계에서 기대하는 기본이자 최상입니다. 그 기본을 갖춘 사람들이 내 눈에는 가장 좋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솔직함을 무적의 둔기 삼아 아무나 들고패지 않고 좌중의 관심을 사려 중상모략을 일삼지 않습니다. 친분을 근거로 타자에게 폭언하지 않고 적재적소에 자기를 적당히 드러내 놓되 무언가를 뽐내거나 미리 위축되지 않습니다.   


 자기답게 살라는 말이 타자를 무시하거나 짓밟으며 살라는 말로 자주 오독되는 이 시대에 그들은 타인을 세세히 보살피며 자기를 오뚝 세웁니다. 타자의 말에 휩쓸려 자기 말을 잃지 않고 자기 말에 타자가 잠식되지 않게 합니다.  


 나는 잘 자란 사람이 정교하게 빚어 놓은 진실을 흠모합니다. 그 진실은 아무도 찌르지 않고 아무것도 뭉개지 않고 그저 공공연히 존재할 뿐입니다.  


 나와 당신이 함께 보내 온 시간 대부분이 그런 진실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나는 홀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내 이야기가 당신을 당신 이야기가 나를 어딘가로 거칠게 밀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느끼는 겁니다. 우리 사이를 넘나들던 수많은 이야기들이 당신한테는 어떻게 느껴졌을까요.


 내가 모두의 이야기를 당신 이야기처럼 듣지는 못했습니다. 때로는 나와 경쟁하려 하지 않는 누군가의 성과를 전해 듣고 공연한 패배감을 느꼈고요. 그 사람 견해가 내 삶을 통째로 부정하는 것도 아닌데 내 것과 다른 생각을 피력하는 사람 앞에서 발작하듯 분노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당신하고 같이 있을 때는 내가 그간 어떤 걸 얼마나 이루어 냈고 얼마나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당신을 만난 것도 아닌데요.  


 당신 앞에 설 때마다 나는 모든 계단들이 사라지고 남은 평지를 보았습니다. 당신하고 같이 있을 때는 모두가 그 평지 위에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모두 똑같은 고도에 위치해 있다고 느낀 겁니다. 그곳에는 앞도 뒤도 옆도 없어서 더 나아간 사람과 뒤처진 사람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거기 이기려는 사람은 있어도 진짜 이기는 사람은 없었고 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있어도 진짜 진 사람은 없었습니다.  


 무슨 수를 써도 승부를 가를 수 없는 그곳에서 나는 내 진실을 경합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내 이야기 들은 사람이 내 약점을 찾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벌벌 떨며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아랫입술을 잘근거리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당신은 내 이야기를 다만 하나하나의 현상으로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군요.  


 당신과 그곳에 머무르며 나는 알았습니다. 왜 화내는 사람이 실은 겁내는 사람인 건지. 내 삶을 드러내 놓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면서 나는 전에 없이 너그럽고 유연해졌습니다. 그런 걸 보면 인간이 타자에게 하는 공격 대부분이 자기 자아를 지키기 위한 방편 같아요. 자기가 완벽하게 안전하다고 믿거나 충분히 강하다고 믿는 사람은 남들한테 송곳니나 날카로운 손발톱을 드러낼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오는 겨울에도 우리는 이미 벌어진 일이나 벌어졌으면 하는 일 따위를 두고 숱한 이야기들을 나누겠습니다. 그 이야기 덤불 안에서 무조건 무사할 거고요. 인간을 진정 넘어뜨리는 건 사건이 아니라 사건을 둘러싼 이야기들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놀라는 겁니다. 하나의 이야기도 아니고 이야기 덤불이 무해할 수 있다는 사실에 번번이 놀라는 겁니다.


 말이 쌓이면 반드시 탈이 난다는 통념이 유효하지 않은 그곳에서 우리가 겨우내 엮을 이야기들을 생각합니다. 고대합니다(끝).




박이로운


1992년 출생. 문학서와 인문서를 주로 발간하는 어떤 마음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까지 약 70여 권의 책을 출간하였다. 영남대학교 환경보건대학원에서 미술치료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마음을 건강하게 다루며 살아가는 일, 소외된 이들의 서사를 들리는 목소리로 바꾸는 일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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