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이합집산, 합할 합 1편
합할 합合.
요즘 사람들 만나는 일은 어때요? 접때 당신 마음 번거롭게 했던 그 관계는 여전히 당신 생활 안에 있는지 모처럼 당신 내부 구조를 재편하는 사람이 나타나 당신이 다섯 번째 여섯 번째 계절 속에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합니다. 그냥 어떻게 지내시고 계신지 물어보고 싶었어요. 생활 전반에 대한 질문을 드리는 것보다는 당장 말할 수 있는 관계에 대한 질문을 드리는 편이 덜 부담스러울 듯해 이 질문부터 드렸는데.
삶의 굴곡이 관계의 굴곡과 동일할 때가 태반이라 어떤 사람들은 관계의 합이 곧 삶이라 말하죠. 그들은 삶을 말하는 것이 곧 관계를 말하는 것이라 여기고 관계를 말하는 것이 곧 삶을 말하는 것이라 여깁니다. 나한테는 그 두 가지가 아주 같은 일은 아닙니다. 나는 삶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는 것보다는 관계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좀 더 쉽다고 느껴요. 종합적인 것에 대한 응답보다는 개별적인 것에 대한 응답이 더 간단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근데 이게 간단하기만 한 응답은 아니라는 점이 재미있어요.
간혹 내가 운용하고 있는 어떤 관계에 관해 말하는 일이 내 삶을 통째로 말하는 일보다 나를 더 유려하게 설명할 때가 있습니다. 삶의 한 부분을 치밀하게 탐구하는 일이 때로는 삶 전체를 발견하게 해 주는 겁니다. 그 발견을 통해 나는 하나 속에도 전체가 있다는 난해한 말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됩니다.
선각자들은 모든 인간이 모든 경험을 통해 궁극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설파했는데 그 근거가 여기에 있을까요. 어디에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진리가 깃들어 있으니 어떤 우물을 파도 인간은 똑같은 앎의 샘에 도달한다.
눈이 바뀌어야 세계가 바뀐다는 말을 요즘 자주 생각해요. 관점이나 안목 같은 걸 바꾸어야 내 세계가 비로소 바뀐다는 생각을 거듭하는 건데요. 당신이 당신 눈높이를 조절할 때 가장 먼저 두드러지게 바뀌는 건 뭐였나요? 내 경우 내 눈높이 변화에 가장 기민하게 반응하는 건 늘 내 주변인과의 관계였습니다.
내가 주로 보는 게 달라지면 내가 자꾸 시선 주는 그곳에서 새로운 관계망이 형성되더라고요. 내가 그 신생 관계망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 내가 이전에 머물던 곳에 내가 구축해 놓았던 관계망은 자연스럽게 (때로는 수동으로) 와해되고요.
웃긴 게 어려서는 그런 식으로 관계망 옮겨 다니는 사람들을 내가 증오했거든요. 기회주의적인 변절자 같아서요. 그때는 절대 그들처럼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 사람들이 대체로 현명해 보입니다. 엉뚱한 데서 쓸데없이 정조 지키다 내 삶 전체를 배반하는 것보다는 내 삶의 필요에 맞추어 이리저리 조금씩 옮겨 다니는 편이 차라리 낫다고 느끼는 겁니다.
누가 시켜서 내가 한 자리에 평생 산 것도 아닌데 살다 보니 이상하게 억울하더라고요. 이렇게 안 살았으면 더 많은 것들 보며 더 누리고 더 성장했겠다, 싶으니까. 내가 안간힘 써 가며 지키고 싶어 했던 내 첫 번째 관계망은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해져 있었습니다. 한없이 흐르는 시간이 때로는 여러 번 깨진 약속이 때로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무럭무럭 발달한 취향이 견고하던 관계망에 부지런히 균열을 내고 있었습니다. 내가 안 보고 싶어 안 본다고 그 균열이 없어지는 게 아니더라고요. 결국 나는 지키려 한 걸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건 애초에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
관계라는 건 개인의 힘만 갖고 영구히 보존할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그 덧없는 걸 끝까지 유지해 보겠다고 나는 그렇게 성실히 발버둥쳤던 겁니다. 어리석은 나로 가득했던 그 버겁고 아름답던 시절을 반듯하게 접어 놓고 나는 지금 이곳에 있습니다. 때가 되었다는 판단이 서면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내가 되어 여기에 있습니다.
순전히 자기 이익만 고려하며 이 조직 저 조직 넘나드는 사람은 기회주의적인 변절자 이름표를 떼기 어려울 겁니다. 그런데 남한테 피해 주지 않는 선에서 자기 필요에 따라 사람들을 가려 만나는 건 지극히 건강하고 또 눈물겹게 정상적인 일이지 않습니까.
만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 받고 싶어 내가 아무에게도 싫은 소리 못하며 한 곳에 정체되어 있는 동안 지혜로운 사람들은 아니라는 말이 필요할 때마다 그 말을 단호히 내뱉으며 자기와 자기 세계를 돌보고 확장해 나갔습니다. 나는 이제야 아니라는 말을 옹알이하듯 연습하는 늦깎이. 만학도인 것이 부끄럽지는 않습니다. 아니라는 말, 싫다는 말, 그만하라는 말을 잔뜩 모아 봉합해 놓은 주머니를 끝끝내 터뜨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에 적지 않은 위로를 받으며 입술을 둥글게 벌리고 아, 아, 합니다. 아니, 아니, 싫어, 싫어(2편으로 이어집니다).
박이로운
1992년 출생. 문학서와 인문서를 주로 발간하는 어떤 마음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까지 약 70여 권의 책을 출간하였다. 영남대학교 환경보건대학원에서 미술치료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마음을 건강하게 다루며 살아가는 일, 소외된 이들의 서사를 들리는 목소리로 바꾸는 일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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