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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Sep 10. 2019

수도 없이 뒤엎으며 사는 게
인생이라

  

“뭐가 걸려서? 마음에 뭐가 걸려 있어서 그러는데? 그쪽에 미안하다는 이유 말고, 또 무슨 이유 있는 거 아니야? 너 지금 너무 쩔쩔매고 있어서, 그런 합리적인 의심이 드는데.”


그렇게 말한 당신이 한숨을 쉬며 다시 내 목덜미에 손바닥을 얹었다. 당신의 손바닥은 서늘하다. 당신이 손바닥에 힘을 주며 내 목덜미를 지그시 누른다. “데겠다, 데겠어. 몸이 이렇게 펄펄 끓는데 너는 대체 뭘 하겠다고 이 난리인지. 기어이 가야겠어? 기어이?”


나는 숨을 느리게 들이쉬었다 내쉬며 당신의 찌푸려진 두 눈을 바라본다. 마음은 무조건 가야겠다고 하는데, 가야겠다는 말을 꺼내기가 어렵다. 당신과 내 몸이 그 말을 반기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가방에서 꺼낸 차가운 생수병을 내 목덜미에 댔다가 내 이마에 댔다가 다시 한숨을 내쉰다. “너 하나 없어도, 세상 잘만 굴러가. 서운해도 사실이 그래. 가지 마, 거기. 그냥 여기 있어. 아니면 내가 너 집까지 데려다줄게. 너 자야 돼. 약 먹고 자야 돼. 너 거기 가서 픽 쓰러져 봐. 그건 민폐 아니야? 아니면 너, 누구한테 약점 잡혔어?”


“그런 거 아니야.”


내가 웃음을 터뜨리며 그렇게 말하자, 당신이 고개를 내젓는다. “웃을 힘은 있나 보네. 너 지금 니가 제정신인 거 같지? 몽롱하지 않아? 어지러울 건데. 눈 밑이 핑핑 돌 건데. 너 진짜 열 너무 많이 난다고. 내 말이 말 같지 않지. 이 고집불통아.”







“나 없어도 진짜 괜찮으려나. 오늘 거기……. 그거 나 혼자 시작한 일이라, 발표할 때 나 없으면 좀 그럴 건데. 자료 다 보내 놓긴 했는데. 그래도, 내가 책임자라. 그리고 뭐 어디가 막 아픈 것도 아니고 열 좀 나는 건데.”


“마음이 왔다갔다하긴 하니?”


당신의 질문이 내 등 어딘가를 푹 찌르는 것 같다. 내가 민망하다는 듯 웃자, 당신이 숨을 크게 들이쉰다. 또 한숨을 쉴 폼이다.


“한숨 그만 쉬어. 마음에 병나겠다. 나라고 고민이 왜 안 돼. 고민하고 있어. 그러니까 여기 눌러앉아 이러고 있는 거 아냐.”


“안 믿어. 너 그거 내 눈치 봐서 하는 말이잖아. 누가 몰라.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도 다 알 거다.”


뭔가를 더 말하려다 만 당신이 생수병을 딴다. 







“무서워.”


내가 갑자기 그렇게 말하자 당신이 나를 얼른 돌아본다. 당신의 표정이 그새 바뀌어 있다. 호기심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는 것 같은 경직된 표정. 당신의 입술이 조심스럽게 열린다. “뭐가 무서워.”


“입장 바꾸는 게. 다른 사람들하고 관련되어 있는 일하다가 내가 갑자기 입장을 바꿔 버리는 게. 아직도 좀 무서워. 예전에는 그게 너무 무서워서, 공동 프로젝트 같은 거 할 때 절대로 내 입장 안 바꿨어.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어도 그냥 참고 했어. 아무하고도 싸우기 싫어서. 미움 받고 싶지 않아서.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건 어려서 지긋지긋할 만큼 많이 했으니까. 누구한테서도 내쳐지고 싶지 않았어. 나도 알아. 난 세상 사람들 전부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고, 살다 보면 나를 강하게 맞서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그게 인생이라는 거. 그걸 알면서도, 막연히, 막연히, 아무 갈등도 안 만들고 살려는 고집을 부리게 돼. 내가. 아주 허무맹랑한 고집을 부리게 돼. 안 되는 건데, 그건. 나를 뭉개면서까지 그런 고집을 부리게 돼. 오늘처럼. 오늘 나 거기 가서 내 몫 제대로 못해도, 누구한테 피해 주는 거야. 니 말 맞아. 어쩌면 내가 오늘 거기 참석 안 하는 게 참석하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인지도. 근데 내가 내 손으로 뭔가를 어긴다는 게 아직은…….”


“어려워?”


“응. 그게 뭐든, 내가 시작한 일이면 그걸 끝까지 무조건 강행해야 한다는 마음이 내 안에 크게 자리를 잡고 있어. 떨치려고 애는 쓰는데. 이게 내 마음처럼 진도가 나가지는 않네. 내가 그렇게 한다고 해도 내가 세상사람 전부를 기쁘게 할 수는 없는 건데. 그냥 머리로 아는 거하고, 머리로 아는 거 마음에서 인정하는 거하고 이렇게 별개다. 상처 같은 게 다 아물어야 마음이 현실을 직시하려나. 그거 아물게 하는 건 온전히 내 몫일 건데. 난장판이네, 나.”


내 말을 들은 당신은 펼치고 있던 다리를 구부려 양쪽 무릎을 맞붙인다. 앉은자리를 모두 고친 당신이 “너무 몰아세웠나.” 하고 중얼거린다. 나는 물을 마시는 당신의 옆모습을 가만히 쳐다본다. 당신의 얼굴빛이 수없이 바뀌고 있다.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이것저것 엎었다, 뒤엎었다, 아주 개판을 내면서 다들 살아가. 난 뭐 난장판 아닌 줄 알아?”


생수병을 꼭 쥐고 한참 침묵하던 당신이 문득 말했다. 당신이 나를 돌아본다. 그 눈동자 안에 뜨거운 무언가가 담겨 있다.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내가 고개를 비스듬히 꼬자, 당신이 다시 입을 연다. “인생 쥐뿔도 모르는 것들이 취미 삼아 순한 사람들 가슴에 상처 내고 다니는 거, 그동안 너무 많이 봤어. 니 안에 있는 상처도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겠지. 니가 마음 바꾸고 입장 바꿀 때마다 너한테 뭐라고 한 사람들은 자기 인생에서 자기 마음, 자기 입장 안 바꾼 줄 알아? 너보다 더 바꿨으면 더 바꿨어. 자기 안에 있는 뭔가가 싫을수록 남한테 더 뭐라고 하게 되는 거니까. 남들한테는 무서울 정도로 엄격한 규칙 요구하는 사람들 심보에 한 번 휘둘리면 한도 끝도 없어. 혹시 아직도 있니? 니 주변에. 니가 뭐 조금만 바꾸려고 하면, 너 지독한 변덕쟁이처럼 보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라고 뭐 별 수 있어? 한 길로만 걸을 수 있냐고. 사람, 다 똑같아. 다를 거 같아도 다 똑같아. 아무리 고상을 떨어 봐도, 완벽하게 말끔한 인생 같은 건 없다고. 완벽하게 일관된 인생 같은 것도. 처음부터 완벽하게 계획된 인생 같은 것도. 인생이 그러면 그게 인생이야? 처음부터 다 정해져 있는 거면 사람이 거기서 뭘 배워? 이리 들이받고 저리 들이받고 하면서 다들 크는 거지. 사람한테 너무 자연스러운 걸 이상하다고 나쁘다고 하는 사람들 말에 귀 열면, 어떻게 되는지 알잖아. 다 알잖아, 너. 근데 왜 계속 곪아 있어. 누군데, 너 아프게 한 사람. 가족이었니?”


거기까지 말한 당신이 문득 소파에서 일어나 창가로 걷는다. “됐다, 됐어. 참 오래 가는 거 같다. 어렸을 때 만들어진 상처 같은 거. 쥐어뜯어 보려고 해도 쥐어뜯어지지가 않고. 또 내 상처는 나만 알아. 상처 준 사람은 상처 준 사람이니까 그 사실 까맣게 잊고 살고. 구경꾼들도 지나간 사건에 대한 관심 금세 잊고. 거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연루돼 있었다 해도, 내 상처는 결국 나 혼자 가지고 살아가는 상처야. 혼자 해결해야 되는 거. 내 잘못으로 생긴 것도 아닌데, 처음부터 끝까지 나 혼자 해결해야 하는 거. 그래서 지나가다 어린 애들 보이면 한 번씩 심장이 철렁거려. 저 새파란 새싹 같은 애들 마음은 무사한가 싶어서. 나한테도 있어. 지워지지도 않고 외면되지도 않는 오랜 상처. 내가 오늘을 살려고 할 때마다 나한테 발 거는 상처. 툭하면 나 넘어뜨리려고 하는 내 오랜 상처. 근데 그게 그냥 오래 가는 게 아니더라. 내가 그걸 자꾸 긁고 있는 거더라고. 내가 거기서 손을 떼지 않는 이상, 그게 아무는 일도 없더라고. 상처에서 손 떼는 거, 누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더라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됐다고. 더 말 안 보탠다고. 부추겨서 미안해. 내 일 아니라고 좀 쉽게 얘기한 것도 없지 않네.”


당신 뒷모습 너머의 하늘에서 조그만 비행기 한 대가 하늘을 날고 있다. 나는 내 상처를 얼마나 오래, 얼마나 세게 긁고 있었던가. 상처 받았다는 이유로 나 자신을 오래도록 옭아매면서, 나는 과연 행복했던가. 이게 내가 정녕 원하던 것이었나. 낡았지만 여전히 아픈 기억들이라는 거. 시간에 저절로 무뎌졌을 기억들을 내 손으로 가져다가 날카롭게 벼린 건 아닌가. 두서없는 생각들이 어지럽게 일어난다. 얼굴과 몸이 와락 뜨거워진다. 이제야 몸에 대한 감각이 되돌아온 건지도 모른다.


내가 신발을 벗고 소파에 드러눕자, 당신이 나를 돌아본다. 그러더니 아무 말이 없다. 역광 때문에 당신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 잠들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나는 눈을 감는다. 당신은 소파에 걸려 있는 내 외투에서 내 핸드폰을 꺼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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