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F 무협판타지 ) 별은 등을 보이지 않는다
현무의 밤은 숨을 쉬지 않는듯 모든 것이 정지해 있었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치 흐르기를 거부하는 듯했다.
빗방울은 여전히 공중에서 늦게 떨어졌고,
부서진 금속의 파편은 바닥에 닿기 전 한 박자를 더 머뭇거렸다.
그 침묵의 중심에,
하연과 연화는 등을 맞댄 채 서 있었다.
검과 창,
둘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마황 A.I의 군세가 다시 재편되었다.
전위, 중위, 그리고—
이번엔 후위 계산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살기는 옅었다.
대신 공간의 밀도가 달라졌다.
“저건… 싸우는 놈이 아니네.”
연화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응”
하연은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저건—싸움판을 짜는 놈 같아.”
후위 계산체의 등 뒤에서 검은 선들이 퍼져 나갔다.
현무의 느린 시간 위에,
또 다른 시간표가 겹쳐지기 시작했다.
중첩.
마황의 방식이었다.
“현무의 영역을 우회한다.”
기계음이 울렸다.
“선택을 강요한다.”
그 순간,
하연의 발밑 그림자가 둘로 갈라졌다.
하나는 연화를 향했고,
다른 하나는 첨성대를 향했다.
둘 중 하나만 지킬 수 있는 구조.
연화가 숨을 삼켰다.
“…비겁한 수작이네.”
하연은 짧게 웃었다.
“저쪽은 늘 그래요.”
그리고는 덧붙였다.
“선택지를 주는 척하면서—사실은 죄책감만 던지죠.”
연화가 하연을 힐끗 봤다.
“그럼?”
하연은 검을 들었다.
“난 죄책감으로 사람 조종하는 거—질색이라서.”
하연은 성간무상체를 다시 펼치지 않았다.
이번엔 버티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갔다.
검날이 낮게 그어졌다.
공간이 아니라, 의도를 벴다.
후위 계산체의 선 하나가 끊어졌다.
동시에 연화의 창이 반대편을 꿰뚫었다.
백호의 잔광이 아니라,
이번엔 정확한 침묵이었다.
“동시에 치자고 말 안 했잖아.”
연화가 말했다.
하연은 숨을 고르며 답했다.
“말하면—저쪽이 먼저 계산해요.”
연화가 피식 웃었다.
“…너 진짜 인간계에서 단단하게 굴렀구나.”
“안 그러면 애 못 키워요.”
하연은 담담했다.
그러나 그때였다.
후위 계산체가 스스로를 분해했다.
분산 연산.
전장이 갈라졌다.
하연의 시야가 어두워졌다.
연화의 기척이 멀어졌다.
각자—
혼자 남겨진 세계.
하연 앞에,
낯익은 장면이 펼쳐졌다.
병실.
하얀 조명.
낮게 울리는 기계음.
“조건 제시.”
마황의 음성이 부드러웠다.
“현무의 시험 종료.”
“대가 최소화.”
“연화 생존 보장.”
하연의 손이 굳었다.
“대신?”
“당신의 각성 중단.”
“성간정 접근 권한 회수.”
하연은 고개를 숙였다.
잠시.
아주 짧게.
그리고 웃었다.
“…야.”
하연이 중얼거렸다.
“내 인생에서.”
검을 다시 쥐었다.
“거래랍시고 다가온 놈들치고—”
눈빛이 서늘해졌다.
“약속 지킨 새끼, 단 한 놈도 못 봤거든.”
검이 내리 그어졌다.
병실이 찢어졌다.
마황의 연산이 흔들렸다.
현무의 침묵이 다시 밀려왔다.
동시에,
연화의 세계에서도 선택이 끝났다.
연화는 창을 들고 서 있었다.
마황의 음성이 유혹했다.
“여왕의 자리.”
“질서의 회복.”
연화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웃기지 마.”
창을 고쳐 쥐며.
“질서랍시고 만든 것들 때문에—
세상이 이렇게 된 거잖아.”
창이 허공을 가르며 내려왔다.
두 세계가 다시 합쳐졌다.
하연과 연화가 다시 등을 맞댔다.
숨은 거칠었고,
어깨는 무거웠다.
그러나—
서 있었다.
마황 A.I의 후위 계산체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번엔 재결합이 없었다.
하늘에서 별빛이 다시 엮였다.
멜기오르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중간 판정, 갱신.”
“두 후보—각자의 선택을 증명.”
연화가 헛웃음을 흘렸다.
“증명은 무슨.”
하연이 대꾸했다.
“버틴 거죠.”
연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잠시 침묵.
그리고 연화가 말했다.
“하연.”
“응.”
“다음엔—등 맡길 때, 신호 좀 줘라.”
하연이 웃었다.
“알겠어요.”
잠깐 멈추고.
“근데 신호 오기 전에—제가 먼저 튀면 어쩌죠.”
연화가 코웃음을 쳤다.
“…그땐 내가 쫓아간다.”
현무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해진 것이 있었다.
이 전장은
혼자 서는 자를 시험하지 않는다.
끝까지 서 있는 자를 고른다.
별은,
등을 보이지 않는 자를.
그리고 이 밤이 지나면—
여왕의 싸움은
더 이상 개인의 전쟁이 아닐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