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빠이
쾌적한 게스트하우스가 저렴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근처에 레드썬이라는 바(bar)가 있는데, 밤새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술을 마시는 사람들의 소음 때문에 새벽까지 잠을 이룰 수 없다. 일교차가 많이 나기도 해서 오리털 침낭 속에 들어가 지퍼를 머리끝까지 올려 보지만 소음이 잔잔해질 무렵엔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더니 억수같이 쏟아지는 통에 빗소리에 선잠을 잔다.
오늘이나 내일 중 언제 라오스로 출발할까 생각 중이었는데, 쏟아지는 비에 떠나려는 의지가 상쇄된다. 늦잠을 자고 침대에서 뭉그적거리다 일어나도 비는 여전하다. 겨울이라 건기라서 비는 예상하지 않았는데 당황스럽기도 하다. 일단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하고 게스트하우스 공용공간으로 나가서 주인아저씨가 마련해 놓은 식빵에 잼을 발라 믹스커피 한 잔과 함께 요기를 한다. 그래도 통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푸른 숲과 내리는 빗방울이 예뻐서 오전 내내 침대에서 게으르게 빗소리를 듣는 기분이 좋다.
커다란 유리문 밖의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발코니로 나가 비를 바라본다. 이웃의 지붕에, 처마의 플라스틱 물받이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경쾌하다. 이 아침의 빗소리와 산골마을을 떠도는 상쾌한 공기는 너무나도 청량하다. 여행지에서 비를 만나면 불행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오늘 빠이에선 그렇지 않다.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리는 아침엔 여행자든 현지 주민이든 그 누구든 빗소리를 즐기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거리엔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다.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려 점심을 먹으러 나간다. 별로 한 일도 없는데 배는 고프다. 사람들이 하나 둘 거리로 나와 식당을 기웃거린다. 태국 음식을 주로 파는 작은 식당에 들어가 팟타이를 주문한다. 밖이 훤히 보여 노점이나 다를 바 없는 식당 테이블에서 빗줄기를 바라보며 식사를 한다.
빗줄기가 가늘어지자 사람들이 하나 둘 지나가는 게 보인다. 깊은 산골의 작은 마을, 공공교통수단은 찾아볼 수 없는 이곳에 내리는 비는 발걸음을 멈추어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살면서 이토록 비를 즐겨본 적이 얼마나 될까? 빗소리가 아름답다고 감탄해 본 건 또 얼마나 있을까?
거리의 노점에선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차를 끓여대고 비에 젖은 사람들이 지나가거나 오토바이가 몇 대 스쳐갈 뿐 어제와 같은 인파는 없다. 개한테 우비를 입혀 오토바이에 태우고 지나가는 사람이 재미있어서 사진을 찍는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여행자도 찍히는 사람도 얼굴에 연신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할 일 없는 비 오는 날도 나름의 즐거움이 있다. 우산을 받쳐 들고 거리를 걷다가 굵어진 빗줄기를 피해 화려한(?) 카페로 들어간다. 꽃다발로 인테리어가 되어 더욱 아기자기한 카페는, 사실 산골마을인 빠이와 어울리지는 않는다. 어제 지나칠 때는, 노점이나 소박한 가게들이 더 잘 어울리는 빠이에 현대적인 카페가 웬 말인가 싶었다. 맑은 날씨라면 절대 들어오지 않았을 테지만 오늘 같은 날씨에 비를 피하기에 좋다. 여기 있는 동안은 한국인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커피를 마시며 와이파이로 한국에 연락도 하고 여행정보 검색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비가 개일 무렵 거리로 나온다. 해가 지고 거리엔 노점이 모여들지만 어제처럼 카메라는 들지 않는다. 당장 필요한 여행용 얇은 바지와 티셔츠를 구입한다. 액세서리 가게의 고양이는 사람이 드나드는 문턱에서 꾸벅꾸벅 졸고 비 그친 저녁의 빠이는 어제보다는 한산하지만 거리엔 다시 음식 연기가 피어오르고 오가는 여행자들과 무언가를 파는 현지인들로 북적인다.
온종일 한 것이라고는, 비를 바라보고 빗소리를 듣고 빗속을 걸어 먹으러 가고 마시러 간 일 밖에 없는 것 같은데 또 배가 고프다. 어제 못 먹은 노점 음식을 골라서 먹어보면서 천천히 걷는다. 그중 맛있던 꼬치를 종류별로 사고, 편의점에서 맥주까지 사서 숙소로 돌아간다. 어젯밤 시끄럽던 레드썬이라는 바를 내려다보며 맥주를 마신다. 밤이 깊어져 동행과 나의 이야기가 쌓이는 동안, 레드썬의 손님들은 요란한 음악과 함께 취하고 있다. 오늘 밤도 제대로 잠들긴 글렀다.
날마다 일요일인 게 여행이지만, 여기 빠이의 여행자들에겐 일상이 휴가다. 아무 볼 것도 없는 태국 북부의 산골 마을에 여행자들이 찾아들어 배낭여행자들의 안식처라고 불렸다는 빠이(Pai). 그 명성이 늦은 밤의 소란으로 빛이 바랜다. 한국 떠나온 지 나흘째 되는 내가 기대한 고요한 산골의 동화는 그만큼 무색해진다. 오래 머물면서 멀리 돌아보면 이런 느낌이 상쇄될 텐데, 빠이가 주목적지가 아닌 우리는 내일 빠이에서 퇴장하기로 한다.
낮에 돌아다니면서 내일 밤 라오스로 가는 일박이일 코스의 이동을 예약해 두었다. 별 일 없이 게으른 하루를 보내는 게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