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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Moon R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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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지 Apr 15. 2020

18/11/17


 설렘을 잔뜩 안고 해변에 누워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던 중에 불현듯 이날이 아니면 따로 쇼핑을 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나 트램을 타고 브로드비치로 갔다. 여행할 땐 하루 종일 걸어 다녀도 다리가 아프거나 힘들지 않은데 쇼핑하는 건 이상하게 너무 지치고 힘들게 느껴져서 별로 흥미가 없다. 하지만 일과 본격적인 생활을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을 장만하긴 해야 하므로 귀찮음을 무릅쓰고 골드코스트 최대 규모의 쇼핑센터인 퍼시픽페어에 도착했다.

 호주 물가를 잘 모르니 오기 전까진 모든 게 한국보다 비쌀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저렴한 것들도 많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게다가 호주는 세계에서 가장 최저시급이 높은 나라 중 하나여서 임금에 대비해 물가가 더 저렴하게 느껴질 때도 많다. 퍼시픽페어 규모는 생각 이상으로 엄청난데 온갖 브랜드의 샵들이 너무 많아서 하루 안에 다 돌아보는 것도 불가능할 것만 같다. 고가의 브랜드도 많지만 저렴한 것들도 넘쳐났다. 하지만 근검절약이 몸에 베인 부모님 덕분에 나 또한 충동적인 소비를 하지 않는 게 습관이 되어있기 때문에 미리 적어놓은 쇼핑 목록대로 구매하고 나왔다.

 쇼핑센터 바로 앞에 트램 스테이션이 있지만 돌아갈 때는 트램을 타지 않고 걸어가 보고 싶었다. 그렇게 길 따라 쭉 걷는데 뭔가 조짐이 이상하다. 아까까진 분명 꽤 하늘이 맑았는데 갑자기 어두컴컴해지더니 급기야 작은 빗방울이 툭툭 내리기 시작했다. 골드코스트에서 늘 맑은 하늘만 봤던 터라 당황스러워서 빠른 걸음으로 열심히 걷고 있는데 빗방울은 점점 더 거세지더니 순식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을 정도가 되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길거리에 있는 모두가 이런 갑작스러운 날씨 변화에 충격을 받은 듯했는데 그런 와중에 서로서로 쳐다보며 이 상황을 재미있어하는 모습이 웃기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쏟아져 내리는 폭우를 맞으며 이리저리 비를 피해 뛰어다니는 사람들, 가게의 처마 밑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비가 약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건물이나 차 안에서 밖에 있는 사람들을 안쓰럽게 쳐다보는 사람들. 그렇지만 대부분의 표정에는 짜증이 묻어나기보다는 오히려 즐거움이 더 잘 드러나 보였다. 짜증이나 화가 날 수 있는 이런 상황을 가볍게 웃음으로 넘긴다니, 여기서는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닌가 보다.

 빗속을 뚫고 전력 질주해서 서퍼스 파라다이스에 도착하긴 했으나 이 폭우 속에 밖에 있는 내가 걱정되신 할아버지께서 차로 나를 데리러 와주셨다. 가지고 있던 비치타월로 새로 산 물건들만이라도 사수하려고 했지만 역부족, 결국엔 쫄딱 젖은 생쥐꼴로 차에 올라탈 수밖에 없었는데 감사하게도 집에서 타월까지 챙겨 와 주신 할아버지. 나온 김에 같이 콜스로 장을 보러 갔다.
 그동안 항상 할아버지께서 식사를 요리해주셨는데 내가 곧 떠나게 되었으니 떠나기 전 한 번이라도 할아버지께 한국 요리를 대접해 드리고 싶었다. 나를 게스트로 받아주신 할아버지께 감사한 마음으로 엄마는 할아버지께 드릴 한국 전통 술과 내가 요리할 때 쓸 수 있는 시판 불고기 양념소스를 산 후 뽁뽁이로 꼭꼭 싸서 캐리어에 넣어주셨다.

 사실 양념소스가 다했지 내가 한 게 별로 없지만 불고기 맛이 생각보다 너무 좋아서 내가 놀랐다. 할아버지도 나도 매우 만족. 불고기용 고기가 안 보여서 얇은 스테이크용 고기를 잘라 넣었는데 부드러운 고기 사이로 재워놓은 양념이 깊이 잘 배여서 환상적이었던 불고기와 함께 내 취업 축하 기념으로 할아버지께서 나 없을 때 미리 사놓으신 화이트 와인을 곁들여 푸짐하게 잘 먹은 저녁. 이런 게 바로 카우치서핑의 묘미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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