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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 쿡 Mar 09. 2020

고정관념이 날 죽였다.  

#버리기

새벽 두시.

문자 한 통이 왔다. 

"사장님, 저는 도저희 그 여자에게 사과할 수 없어요. 그리고 사장님도 그 여자 편만 드시는 거 잘못하시는 거예요. 내일부터 일 못하겠으니까 월급 입금해주세요" 운영 중인 경양식 매장의 주방장의 문자였다. 

'주방장 한 사람이 주방을 다하고 있었는데... 문을 닫아야겠구나...'

이 문자 한 통으로 나는 그날 더 이상 잠을 잘 수가 없었다. 

8 개월 전 권리금이 싸게 나온 식당이 있다고 부동산 업자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그 자리의 권리금 시세를 알고 있었던 터라 다음날 바로 계약을 했다. 그 자리는 현재 쌀국수를 팔고 있었는데 예전만 못해진 매출로 주인이 장사를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나는 그래도 이 동네에서 현재 3개를 운영 중이었고 쌀 국숫집을 받아서 크게 바꾸지 않고 그 쌀 국숫집을 살릴 계획이었다.  인수인계 후 자신만만하게 시작한 쌀 국숫집은 역시 이름만 바꿨더니 손님의 반응은 시원찮았다. 그렇게 4개월 정도 운영하다가 수익이 별로 없자.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경양식집을 해보기로 했다. 인테리어 분위기도 그렇게 다르지 않고 아무리 못해도 지금 쌀국수보다는 낫겠지 하는 생각에 장식 좀 바꾸고 간판도 바꾸고 주방 메뉴도 경양식집답게 돈가스 함박스테이크 등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포크와 나이프"라는 유치 찬란한 이름을 걸고 매장에도 사람만 한 포크와 나이프를 만들어 포토존으로 만들었다. 

오픈 행사도 안 했고 천천히 손님을 늘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시간이 지나도 손님이 늘기는커녕 쌀국수 할 때 유지했던 매출보다 더 빠지기 시작했다.  임대료가 400인데 매출이 800... 후들후들... 그렇게 3개월을 운영하니 한 달에 800 정도가 마이너스였다. 게다가 그때 냉면집이 비수기에 들어 매출이 거의 제로 엿고 어머니 병환으로 병원비를 수천만 원 지출하는 상황이었다. 

매출을 올리기 어려웠고 처음으로 직원들 월급날에 급여를 주지 못하는 상황이 왔다. 그래도 네 개 매장의 직원들에게 사기를 북돋와 준다고 회식을 했는데 그날 경양식 여자 주방장이 15살도 많은 홀써빙 아주머니를 화장실에 감금하고 욕을 퍼부었다는 것이다.

이튿날 그 이야기를 듣고 여자 주방장을 불러 자초 지종을 물었다. 하지만 홀 여직원 언니에게 욕을 할 만큼 잘못한 건 없었다.

"누가 잘못을 했던 그런 방식으로 어른에게 욕을 한건 너의 잘못이다. 내일까지 사과하지 않으면 너를 데리고 함께 일할수 없겠다"

이 말을 하고 나는 몇 번을 마음속으로 후회했다. 왜냐면 그 주방장이 나가면 경양식집은 문을 닫아야 하는 판이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20명이 넘는 직원들이 이 사건을 알고 있는데 이 사건을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나는 그 여주 방장이 사과를 하길 간절히 바랬지만... 역시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날 새벽에 나에게 문자를 했다.   

'사장님, 저는 도저희 그 여자에게 사과할 수 없어요. 그리고 사장님도 그 여자 편만 드시는 거 잘못하시는 거예요. 내일부터 일 못하겠으니까 월급 입금해주세요'

직원들에게 이사실을 알렸고 직원들의 눈에 정의로운 사장으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다. 

경양식집 문을 그날 바로 닫았고 사무실 책상에 앉아서 이 말을 중얼거렸다. 

'어떡하지?... 어떻게 하지? 이제...'

나는 살아오면서 한 번도 이 말을 뱃어본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 일이 어마어마한 사업도 아니었고 안될 때면 내가 몸으로 때워서 장사를 해왔기 기 때문에 해결하지 못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문제가 달랐다.  내 손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을 조금씩 만들어 놓고 정작 내가 몰랐었던 것이다. 

앞으로 한 달 뒤면 마이너스 통장의 잔고도 바닥을 드러내는 상황.

그날은 하루 종일 일만 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 당시 나는 모 대학의 상권분석 교육과정을 다니고 있었다. 거기서 나와 동갑인 식당 사장을 만났다. 그는 일산에서 꽤 유명한 작은 식당 사장이었는데 요리사 출신도 아니지만 그 식당을 그지역에서 유명한 식당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현재 나의 상황이 어렵다는 것을 이야기했고 내 식당에 와서 나에게 주꾸미와 피자를 함께 주는 식당으로 바꿔보는 것을 제안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내가 그래도 일식으로 20년을 해왔는데 어떻게 그런 정체불명의 메뉴를 만들어?"

한편으로는 나를 무시하나? 하는 생각에 화도 났다. 그 사장은 잘 생각해보라며 그런 메뉴로 잘되는 식당들을 몇 군데 추천했다. 

며칠 동안 나는 당연히 그건 말도 안 되고 나 같은 전문 요리사가 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매장 문은 닫아놓은 상태에서 마냥 이렇게 망설일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식당들을 찾아가 보았다. 

주꾸미, 화덕피자, 국수를 세트메뉴로 내놓은 식당들... 나는 깜짝 놀랐다. 

손님들이 줄을 서서 먹고 있었다. 그런 정체불명의 조합의 음식을 파는 식당에 여자들이 바글바글... 도대체 이게 무슨 영문인지...

사람들은 대부분 전문적인 음식을 원한다고 생각했고 이런 음식을 팔더라도 이렇게 반응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더군다나 그 음식의 상품력은 대단하지도 않았다. 단지 메뉴 구성으로 승부를 건 식당들이었다. 

나는 고민이 깊어졌다. 이걸 구현하기 위해서는 화덕피자도 만들 줄 알아야 하고 주꾸미 메뉴도 전문적으로 볶을 줄 알아야 하는 건데...

또 이런 메뉴를 한다는 것은 요리사가 할 일은 아니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선택권이 없었다. 결국 그 메뉴로 매장을 바꾸기로 했다. 하지만 우선 지금 자금 문제로 직원 월급도 못주는 상황에 돈을 구할 길이 막막했다. 결국 항상 나를 도왔던 친구에게 마지막으로 부탁을 했다. 그 친구는 망설임 없이 나를 믿고 몇천을 융통해 주었다. 

이번에는 꼭 제대로 해야 했다. 그래서 메뉴를 여기저기서 배웠고 내가 알고 있는 요리 지식을 총동원해 메뉴를 개발했다.

우연히 네이밍과 브랜딩을 하는 전문가를 만나게 되었고 어렵게 어렵게 그분과 함께 이번 매장을 만들기로 했다. 

한 달 뒤 나는 그 주꾸미 볶음 식당을 오픈했고 크게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몇 개월 뒤부터 줄을 서지 않으면 먹을 수 없는 식당이 되었다. 


이 매장은 다른 식당의 카피 매장이다. 하지만 기존의 원 형 태의 매장들은  약점을 안고 있었고 나는 그 약점을 조금 보완한 것이 주꾸미 식당의 성공 요인이기도 했다. 이 식당을 만들어 가는 과정 중에 가장 힘들었던 것은 브랜딩 회사의 생각과 내 생각이 너무 달랐었던 점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했던 방법에서 벗어나 이번만큼은 그들의 생각이 손님의 관점에서 보는 눈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들의 생각을 적극 반영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 생각을 모두 버려야 했다. '손님이 이런 걸 원했나? 손님이 이 분위기를 원한다고?' 정말 믿기지 않았지만 식당이 모두 다 만들어진 후 손님의 반응을 보고 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놀라움의 크기만큼 내가 버려야 할 고정관념이 많았던 것이다.  내가 팔고 싶은 것과 손님이 사고 싶은 것이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손에 쥔 콩을

#버려야

#고구마를 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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