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그리트 뒤라스,《연인》
열다섯 살 반, 강을 건넌다. 사이공으로 돌아올 때, 특히 버스를 타고 올 때는 마치 여행 같다. 그날 아침도 나는 어머니가 근무하던 여학교가 있는 사덱에서 버스를 탔다. 방학이 끝나는 날이라는 것만 기억날 뿐 그 방학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16쪽)
나는 글을 쓴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번도 글을 쓰지 않았다. 사랑한다고 믿으면서도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 나는 닫힌 문 앞에서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35쪽)
나는 항상 얼마나 슬펐던가. 내가 아주 꼬마였을 때 찍은 사진에서도 나는 그런 슬픔을 알아볼 수 있다. 오늘의 이 슬픔도 내가 항상 지니고 있던 것과 같은 것임을 느꼈기 때문에, 너무나도 나와 닮아 있기 때문에 나는 슬픔이 바로 내 이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나는 그에게 말한다. 이 슬픔이 내 연인이라고. (57쪽)
먼 훗날 삶을 회고하며 다른 건 몰라도 이 순간만은 잊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순간을 함께했던 이는 누가 될까.
작가는 자전적 이야기를 통해 더욱 실감 나게 소녀였던 시절의 탈출하고 싶었던 폭력적 세계를 그린다. 그리고, 그 세계 속 어머니와 오빠들과의 관계들에서 어떤 상처를 받고 자라게 되었는지를 담담하게 표현한다. 동시에 피식민지 국적을 가지고 식민지에서 생활했던, 가난하고 비참했던 삶의 순간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 시간들을 탈출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차 있던 소녀는, 한 남자를 만나고 순식간에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다. 사랑의 열정은 잠시나마 그녀를 탈출시켜주지만, 완전한 해방을 선물해줄 수는 없다. 예정된 결말을 맞이한 연인은 무력하게 서로 다른 운명을 받아들이게 된다.
영화화도 퀄리티 높게 이루어져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다. 특히 차 안에서 두 남녀 주인공이 서로에게 끌리는 연기나 소설 속 그대로인 화면 연출에 감탄했다. 하지만 이들의 열망이 어디에서 기인했던 것이며, 각자의 결핍이 어떤 환경에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깊은 감정들을 알기엔 소설 원작을 읽는 것이 역시나 더 좋다. 서로에 대한 마음이 왜 그렇게 복잡한지 더 잘 알 수 있으니. 특히 이들의 관계는 나이뿐 아니라, 계급과 인종 등 다양한 관점에서 읽어 볼 수 있기에 많은 이야기를 할 여지가 있는 작품이다.
한편 소설에는 소녀의 어린 시절을 혼란으로 모는 아픈 어머니가 등장한다. 그래서인지 주인공의 무의식적 목표는 어머니의 세계를 극복하는 데에 놓여있는 듯했다. 하지만 결국 알 수 있는 건 어머니의 폭력의 기원은 부재하는 아버지와 오빠의 세계였다는 것. 어머니가 내면화한 '여자아이'에 대한 폭력적 시선이 딸과 어머니를 어떻게 억압하는지도 읽을 수 있었다. 연인의 관계뿐 아니라, 딸과 어머니의 관계가 어떻게 뒤엉켜 있는지에 대해 분석하며 읽어보아도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