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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희 Aug 06. 2017

십 년이 지나 도착한 다정한 진실

손보미, 《디어 랄프 로렌》



넘어진 자리에서 발견한 것


지도교수의 연구실에서 쫓겨나면서 지난 9년 동안의 유학  실패 선고받은 종수. 그는 줄곧 자신이 잘 하고 있다고 믿어왔기에 갑작스러운 실패의 비참함에 깊게 빠져 허우적댄다. 인생 최대의 실패 앞에서 분노와 혼란스러움을 주체하지 못한다. 그러다 그는 자신의 서랍장에 쳐박혀 있던 오래된 편지들을 읽게 된다. 그리고 편지들 사이에서 잊고 있었던 것조차 놀라운 수영의 청첩장을 우연히 발견한다.


디어 종수, 나는 아주 잘 지내. 곧 결혼식을 올릴 거야. 나는 무척 행복해.
너도 잘 지내길 바란다.


수영은 랄프로렌 컬렉션을 갖고 싶어 하던 고등학교 동창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랄프로렌 브랜드의 아이템을 갖고 싶었던 그녀는 컬렉션을 완성시켜 줄 '시계'가 필요했다. 종수는 그런 수영을 도와 함께 랄프로렌에게 시계를 만들어 달라는 편지를 번역했던 여름을 떠올린다. 종수는 청첩장이 불러일으킨 잊고 있었던 기억들에 이끌려 '랄프 로렌'의 생애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비로소 자신의 비참함을 잠시나마 잊게 해 줄 몰입할 무언가를 찾은 것이다.


아마 그는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시절 랄프로렌에게 보내려던 쓸데없는 편지가,

수영과 함께 했던 맥도널드에서의 시간들이,

공부밖에 몰랐던 그의 성적을 떨어트렸고,

점점 더 떨어지는 성적을 보다 못한 부모님이, 그를 유학길에 오르게 했으며,

그것이 지금의 실패의 씨앗이라고.


랄프 로렌은 왜 시계를 만들지 않는가로부터 출발한 그는 유년시절 랄프 로렌을 키워 준 조셉 프랭클이라는 인물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의 생전을 기억하는 레이철 잭슨과 잭슨 여사의 간호인 섀넌 헤이스까지 알게 된다. 그의 끈질긴 추적은 사소한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불러일으킨다.


기록되지 않았던 한 인물의 생애의 이면에 얽힌 에피소드들을 들으며 그는 놀랍게도 일어설 힘을 얻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그제야 지도교수 기쿠 박사가 그에게 했던 말, "종수, 인생은 길어, 정말이지 길어." 개소리라고 생각했던 그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아가기 시작한다.


어떻게 이 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 있었을까? 나는 쓸쓸했고, 화가 났고, 엄청나게 슬퍼졌다. 나는 부서진 것 투성이의 불 꺼진 방안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새벽의 희뿌연 빛이 창으로 들어올 즈음 나는 모든 편지를 상자 안에 집어넣어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렸다.

(33쪽)
"종수, 인생은 길어, 정말이지 길어."
나는 그게 개소리라고 생각했다.

(25쪽)



우리 모두 단점이 있고 한계가 있지만


"디어, 는 다정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만 쓸 수 있는 말인 것처럼 느껴져. 아주 친밀하고 따뜻해."


다시 편지를 썼던 열여덟 살의 여름으로 돌아가 보면, 그때의 종수는 수영의 편지가 '디어 랄프 로렌'으로 시작하는 것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세계적 디자이너에게 보내는 편지라면 첫 줄부터 눈에 확 띄어야 하기 때문이었다고 회고하지만, 사실 종수는 수영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종수는 여유로운 가정환경에서 경제적 걱정 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가질 수 있었던 성장기를 보낸다. 그래서인지 본인은 의식하지도 못했지만 수영이 소중하다고 여겼던 것들을 실은 하찮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한 순간 발견기억이 알려준 것은 바로 그랬던 그의 진짜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가 과거에 품었던 다른 이들에 대한 '몰이해'들. 자신의 기준 혹은 세상의 기준으로 이리저리 타인의 삶을 쉽게 평가했던 것, 타인의 취미를 쓸모없다 생각했던 순간들 말이다.


동료 교수들에게 '과대평가되었다'는 비난조의 비판을 받는 기쿠 박사(종수의 지도교수)는 겨울이면 피겨스케이팅에 집중한다. 그런가 하면 랄프 로렌을 키워 주었던 조셉 프랭클은 완벽한 시계공이면서 형편없는 권투선수이기도 하다. 평생을 단정하게 살아왔을 것 같은 잭슨 여사는 메릴린 먼로를 오래 동경해왔고, 무슨 말이든 필터링 없이 내뱉는 듯한 섀넌 헤이스에게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 있다.


이처럼 종수가 만나온 사람들은 자기 삶에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부분들을 만들고 있었고, 그게 타인에게 어떤 평가를 받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것이 무의미한가? 그들의 이런 행동들이 쓸모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 모두 단점이 있고 한계가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들이 형편없다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지 않겠냐'라고 말할 것 같은 수많은 타인들을 만나며 비로소 종수 또한 자신의 실패를 딛고 일어설 힘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제야 수영의 편지 첫 문장 '디어 랄프 로렌'이야말로 온전히 그녀를 행복하게 했을 문장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결국 종수는 랄프 로렌의 삶에 대한 정확한 사실 관계를 정리해내는 성과 따 내진 못하지만, 남들이 보기엔 말 그대로 쓸모없었던 미국에서의 마지막 시간들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더 중요한 것을, 낯선 타인들의 이야기들 속 다정한 진실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넌 어떤 식으로 살고 있니? 종수야?
나는 그저 도망친 것뿐이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다는 사실로부터, 혹은(아마도 이편이 더 적절할 것 같은데) 내가 누군가에게 그토록 미움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사실로부터.

(274쪽)
이들 모두 조셉 프랭클의 그러한 신랄한 평가가 100퍼센트 들어맞지는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이렇게 항변하고 싶을 것이다. "우리 모두 단점이 있고 한계가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들이 형편없다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지 않겠습니까?"

(341쪽)
그해 여름 내내 우리는 이미 죽고 없는 랄프 로렌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우리가 편지를 쓰기 위해 메모를 해두던 연습장에 그녀가 연필로 한 자 한 자씩 디어 랄프 로렌, 이라고 꾹꾹 적는 모습을 떠올린다. 그녀는 그 문장을 쓰면서, 아마도 무척 행복했으리라. 그리고 그녀가 그 시간 동안 무척 행복했으리라는 것을 나는 아주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3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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