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희 May 19. 2020

과거의 상처가 현재를 괴롭힐 때

상처받았던 기억이 우산처럼 활짝 펼쳐지는 순간을 줄이는 방법

순간 경안의 기억 속에서 주황색 바탕에 흰 물방울무늬가 찍힌 우산이 활짝 펼쳐졌다. 어쩌면 그 기억 때문에 이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권여선, <실내화 한 켤레> 중)







권여선 작가의 소설 <실내화 한 켤레>에는 아주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 하루를 보내는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경안과 혜련, 그리고 선미. 이렇게 셋은 고등학교 동창이었지만 졸업 후 연락이 끊겼다가 우연히 연락이 닿게 되어 만나게 된다. 경안으로서는 조금 갑작스럽고 부담스러운 혜련의 반가움에 못 이겨 이들은 대낮부터 만나 가볍게 반주를 걸치게 된다.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셋은 서로의 관계에 대해 서로 다른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경안은 혜련과 선미가 자신에게 수학에 대한 질문을 자주 하던 기억이 크다. 두 친구에 비해 수학을 잘하는 편이어서 숙제를 도와주었던 기억들. 거기에 더해 혜련과 선미가 놀 때는 공연을 보러 다니곤 했는데, 그럴 때 자신은 의도적으로 빼놓고 간다고 생각했던 기억들. 경안에게는 묘한 소외감을 느끼며 혜련과 선미가 놀러 가는 뒷모습과 실내화 한 켤레를 바라보며 쓸쓸히 우산을 펼치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있다.


반면 혜련의 경우, 오히려 학업에 소홀한 자신을 경안이 한심하게 여겼던 것 같다고 기억한다.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고, 자주 공연장이나 클럽으로 놀러 다니는 선미와 혜련을 무시하였기에 오히려 경안이 거리를 둔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셋은 같은 시간 속에서 서로 다른 상처를 받았고, 그것들을 제각기 기억하고 있는 셈이다.


이 소설은 우연히 만난 동창들이 각자 못 다했던 이야기들을 하고 관계가 완벽하게 풀어지면서 '추억, 우정 만세!'식의 해피엔딩을 그리지 않는다. 단지 시간이 오래 지난 후 만나게 된 이들의 적당한 거리 두기나 감정의 변화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오늘 인용한 문장도 세 인물이 대화를 나누다 경안이 그들에게 상처 받았던 순간의 기억이 선명하게 펼쳐지는 때를 묘사한 부분이다.


대화의 소재가 당시의 상처를 회상할 수 있는 것으로 옮겨가게 되자, 경안은 자신도 모르게 둘이 자신을 남겨두고 가버렸던, 비 오던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자신이 받았던 상처가 무엇이었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던 경안은 그제야 왜 이들의 연락이 불편했던 것인지 알게 된다. 그리고 좋게 마무리될 수도 있었을 그날의 만남은 점점 이상하게 꼬이고 어긋나게 된다. 그날 이후, 그들은 절대 다시 연락을 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세 인물이 그랬듯, 우리는 각자가 가진 상처가 어느 순간 우산처럼 활짝 펼쳐질지 모른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한다. 과거의 기억들이 계속해서 현재의 관계들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모두 상처 받았던 기억이 우산처럼 펼쳐질 때가 있다


상처 받았던 기억은 그와 비슷한, 혹은 그 기억을 떠오르게 만드는 어떤 상황이 연출되면 머릿속이 하얘지고 감정 조절이 어려워지게 만든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상황들을 제대로 표현하기도 애매하고, 스스로도 그것이 자신의 트라우마 인지도 잘 인식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인식하지 못하면 과거의 기억은 더 다루기 어려워진다. 누군가의 말이 의도치 않게 나의 상처를 건드렸다고 해서 일일이 설명하고, 지적하다 보면 관계가 틀어지고 역효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그 기억에 대한 객관적인 거리 확보가 되지 않아서 매끄럽게 속상한 마음을 전달하기 어려울수록 더 그렇다.


그럴 때에는 나의 상처를 누구보다 내가 먼저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아예 없던 일들이 될 수는 없으므로 완전히 극복하겠다는 마음보다도 잘 다루는 방법을 습득하겠다는 노력이 필요하다. 과거에 대한 정리가 잘 되지 않아 내 우산이 언제 펴질지 모르는 순간이 많으면, 나도 모르게 평소와 다른 이상한 행동들을 하고 후회하는 순간들도 많아진다. 만일 어떤 말이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면 타인이 선의로 건넨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는 건강치 못한 상태가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만약 과거에 대한 정리가 되어서 어떤 순간에 나의 감정이 이상 신호를 보내는지 잘 알게 되면 갑작스럽게 우산이 펴지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게 된다. 나에게 위험한 상황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까운 지인이 어떤 순간 평소와 조금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될 때에도 차분히 기다려줄 수 있게 된다. 그 사람도 어떤 상황에 대해서 본인도 모르는 상처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니까. 누군가의 의도 없는 행동에 상처를 받아 보았기에 나 또한 의도 없이 타인의 아픈 기억을 들춰내기도 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신기하고 다정한 한 외국 사이트를 발견했다


'개가 죽나요'(doesthedogdie.com)라는 주소를 사용하는 이 곳에선 영화 속에 다양한 장면들의 여부를 알려주는 리스트를 제공한다. 개가 죽는 장면이 나오는지부터 시작하여 뱀이 나오는지, 폭발 장면이 있는지 등의 체크리스트들이 한 영화에 쭉 달려있는 방식이다.


<www.doesthedogdie.com> 의 리스트 중

다양한 질문들이 준비되어 있고 장면의 심한 정도를 표시해 주기도 한다. 누군가의 트라우마를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그것을 미리 대비할 수 있게 도와주는 리스트인 셈이다.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있는 사람도 많겠지만, 누군가에게는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장면이 있다는 (어쩌면 당연한) 생각이 전제된 공간이었기에 이 사이트가 참 따뜻하고 뭉클하게 느껴졌다.


나의 과거에 대한 재정리는 타인에 대한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나의 상처를 잘 이해하고, 타인의 상처를 상상하는 것이야 말로 점점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으면서 연마해야 할, 무엇보다도 중요한 능력치는 아닐까. 그리고 그건 정말로 별것 아닌 것이 아니다.






이전 07화 평범한 사람이 괴물이 되는 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