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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희 May 22. 2020

평범한 사람이 괴물이 되는 순간

잊지 마. 내가 이렇게 아플 수 있으면 남도 이렇게 아플 수 있다는 거.

잊지 마.

내가 이렇게 아플 수 있으면 남도 이렇게 아플 수 있다는 거. 제대로 연결해서 생각해야 해. 그런데 이렇게 연결하는 것은 의외로 당연하게 일어나는 일은 아닌지도 몰라. 오히려 그런 것쯤 없는 셈으로 여기며 지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는 정도인지도 몰라. 그러니까 기억해두지 않으면 안 돼. 안 그러면 잊어먹게 되는 거야.


잊으면 괴물이 되는 거야.


(황정은, <계속해보겠습니다> 중)






언뜻 보아도 무시무시한 경고의 말이다. '잊지 마.'로 시작하는 단호한 오늘의 문장들은, 황정은 작가의 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에 등장하는 무르고 물렀던 인물인 나나가 무려 한때 연인이던 이에게 하는 말이다. 그녀가 이런 독한 말을 내뱉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나나는 모세를 만나고, 서로 호감을 가지고 관계를 이어나가게 된다. 그리고 모든 만남이 그러하듯 두 인물도 시간이 지나 관계가 깊어지나 하는 찰나, 각자 살아온 규칙이나 방식들을 상대방에게 드러내는 순간이 찾아온다. 모든 관계들에 찾아오는 순간이지만 이 순간을 대하는 태도를 극단적으로 나누어보면 이렇지 않을까 싶다. 그저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존재하는 여러 배경을 이야기하는 것, 또는 자신이 살아온 배경을 이야기하며 상대방까지도 기어코 가져다 놓고 싶어 하는 것. 모세는 후자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모세는 자신이 나고 자란 가정에서 느낀 것이 온전한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것이 이전까지 아주 타인이었던 나나에게 닿았을 때에도 행복일 거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가족이 자신에게 그러하듯, 온전하고 행복한 가족을 이루고 싶어 하는 모세는 나나도 같은 행복을 꿈꿀 것이라 쉽게 생각해버린다.


모세의 집에 초대된 나나는 화장실에 갔다가 무언가 이상한 물건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바로 요강이다. 나나는 나중에 모세에게 그 요강이 정말 요강으로서의 용도로 존재하는지를 묻는다. 모세는 요강의 이상함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눈치로 말한다. 그건 아버지가 쓰시는 것이고, 어머니가 치우시는 것이라고. 가족이니까, 이상하게 생각할 건 없다고 덧붙이면서.


모세는 그에게 당연했을 안정감과 행복이 전혀 다른 타인이었던 나나에게는 이상하고 불편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나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세를 이해하지 못한다. 가족이니까 괜찮다는 모세의 말에서 나나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요강 사건은 (당연하게도) 결정적으로 나나에게는 모세와 더는 만나지 못할 이유가 되어버린다. 모세는 헤어짐을 결심한 나나의 집에 찾아와 자신이 꿈꾸던 행복은 이것이 아니라며 무작정 떼를 쓰고 그러다 힘을 쓴다. 결국 나나에게도 신체적 위협을 가한다.




이외로 연결은 쉽지 않다는 것


나나는 말한다. 타인도 나와 같이 아플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잊는 것은 너무나도 쉬워서, 애써 노력해 기억해야 하는 일 중 하나라고. 나는 나나의 말이 여러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소수자에게 가해지는 정당치 못한 폭력에, 혹은 어쩌면 폭력이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상황들에 말이다. 그리고 그건 아주 작게는 나의 하루에도 적용되는 말이었다.


조금 바꿔서 이야기하자면 나의 행복이 중요한 만큼, 나의 하루가 중요한 만큼, 나의 기분이 중요한 만큼 다른 누군가의 그것도 있는 그대로 존중해줘야 할 중요한 것이라는 표현으로. 그런데 정말이지 내가 아프고 외로웁고 슬프고 힘들어서 모든 일이 도통 환멸스럽기만 할 때에는, 나나의 말처럼 다른 누군가도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자꾸만 잊게 되는 것 같다. 의식적으로 그러지 않으려 노력해도 자꾸만 그렇다. 그리고 종종 그렇게 된 이들을 볼 때에도 그들이 괴물이어서가 아니라 너무나 평범한 이들이어서, 나도 그런 적이 있어서 더더욱 속상하다.


평범한 사람이 괴물이 되는 순간


하루를 마치고 나면 왜인지 모를 막연하고 공허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퇴근길에는 누구도 나에게 뭐라 한 적 없고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 데 괜히 머리가 띵하고 마음 한 켠이 싸하다. 게다가 이런 기분이 반복되면서 마음이 쪼그라들고 신경이 예민해진다. 의식적으로 이런 감정이 들 때를 항상 주의해야지 싶으면서도 그게 잘 되지도 않는다. 평소 같으면 웃고 넘어갈 일들을 곱씹고 누군가의 말과 시선을 비틀고 비꼬아서 안 느껴도 될 상처와 스트레스를 꽁꽁 쟁여둔다.


문제는 그런 감정을 잘 다루지 못하면, 그렇게 모인 뾰족한 마음이 타인에게 향하기 쉽다는 것이다. 나의 아픔을 잘 다루지 못하고 거기에만 집중하니 마음이 점점 좁아진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든다. 나도 이렇게 견디고 있는데 대체 왜 나에게 불만을 늘어놓는 건지, 나라고 너무 행복해서 웃는 건 아닌 데 뭐가 그리 좋냐고는 왜 묻는 건지, 더 나아가서 네가 힘든 건 별거 아닌 것 같은데? 하는 정말 별로인 생각까지.


인정하기 어렵지만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못되고 별로인 감정들이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에게도 마음이 아프고 쪼그라들었을 때면 쉽게 찾아오는 방어적인 생각들이고. 그럴 땐 정말 애써 노력하지 않으면 타인의 힘듦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내 마음에 여유가 없으니까, 굳이 들여다보고 싶지도 않다. 그렇게 평범했던 우리는 점점 괴물이 된다. 평범하게 일상을 간신히 버텼을 뿐인데. 그런 순간들이 쌓이면 점점 괴물이 되어서,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타인의 상처에는 쉽게 공감하지 못하게 된다.




그럴 일은 없으니까,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최근 읽은 김동식 작가의 <회색인간>은 전에 없던 문체와 직접적인 문제의식으로 디스토피아를 그린다. 그런데 그 디스토피아적인 상황이 역설적이게도 현실의 어떤 문제들을 해결하기도 한다. 인상 깊었던 작품 중 하나는 전 세계의 사람들의 목숨이 일대일로 연결되어 있는 설정으로 시작되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속 디스토피아에서는 누군가가 죽으면 무조건 또 다른 누군가가 따라 죽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나와 연결된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노화로 인한 자연적인 죽음을 제외하고는 막을 수 있는 죽음을 최소화하려는 전 세계적 노력이 일어난다. 질병이라던가 혐오 범죄, 폭력, 전쟁으로 희생당하는 인류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자 이 세상의 모든 범죄와 폭력, 전쟁은 사라진다. 이 상황은 매우 극단적이고 이상적인 상상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이는 생각보다 간단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현실에서는 나와 연결된 사람의 아픔이 일대일로 교환되는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니 그런 극단적 상황에 놓이기 전에 만약 우리가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만 정확하게 깨닫는다면, 무언가 완전히 바뀔 수도 있다는 해답을 말이다. 물론 서로가 서로에게 가하는 폭력이 모두 사라질 수도 있다는 소설의 이상적인 결말은 거의 불가능한 해답일 수 있겠다.


그렇지만 거의 불가능한 해답으로 가는 길을, 적어도 나의 하루에는 가능한 선택지로 남겨둘 수도 있다. 어렵지만 가능한 선택지를 남겨두는 것은 무엇보다도 나의 선택이고, 자존이기도 하다. 가끔은 어려운 선택지를 애써 가지고 있는 일만으로도 괴물이 되는 나의 모습을 보는 횟수를 줄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오늘 하루만큼은 의외로 당연하게 일어나는 일이 아닌 일. 오히려 그런 것쯤 없는 셈으로 여기며 지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는 정도인 일. 그러니까 기억해두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일을 해보자. 그리고 하루를 마치고 난 후에는 그런 일을 해낸 나의 애씀을 있는 힘껏 칭찬해주자. 어쩌면 애써 간 어려운 길이 답이 없어 보였던 공허에서 나를 벗어나게 해줄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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