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마음과 잘 하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무언가를 가리킬 때
필요한 것은 많지만 원한다는 건 그것과는 다른 뜻이다. 그것은 욕망과도 다른 뜻일 것이다. 내가 깨닫는 모든 것이 그렇듯 당신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나는 당신을 원한 것도 욕망한 것도 아니었다. 당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내 안에 불이 켜지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발광 액체가 되어서 당신에게로 흘러가 스며들어 당신이 되는 느낌이었다.
(은희경, <장미의 왕자>)
<장미의 왕자>는 은희경 작가가 GQ KOREA로부터 '수트'라는 소재를 제안받아 쓰게 된 단편소설이다. 소설 속에는 수트가 등장하긴 하지만, 수트를 입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두 인물의 목소리가 더 자주 등장한다. 이들의 목소리는 시작부터 끝까지 희미한 안갯속을 걷는 것처럼 조용하고 차분하게, 다소 비관적으로 흘러간다. 자신의 존재를 초라하게 바라보는 공통점이 있는 화자들의 연약한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지금 말한 건 누구였더라 싶은 기분도 자주 든다. 이는 실제로 여성과 남성 두 화자가 번갈아 이야기를 하고, 인물들의 이름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중 여성 화자는 오래전부터 자신은 사랑받기 어려운 존재라고 생각해온 인물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누군가는 알아봐 주길 바라면서도 끝끝내 혼자서, 추운 골목길을 발 시린 운동화를 신고 걷고 또 걷는다. 동시에 그녀는 동화 '장미의 왕자'이야기를 자주 떠올린다.
그녀가 기억하는 동화에 따르면 옛날 옛적, 어느 왕자가 태어났을 때 요정들은 아름다움과 고귀함 같은 귀한 생일 선물을 잔뜩 준다. 하지만 행복하고 완벽했던 왕자의 생일 막바지에는 어김없이 불청객이 등장한다.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마녀는 왕자에게 장미 한 송이를 전하며 저주를 건다. 앞으로 왕자는 그 장미를 지니고 있을 때에만, 앞에 받았던 선물들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왕자는 늘 그 장미 한 송이를 옷깃에 꿰맨 채 성 안에서만 조심스럽게 살아간다. 장미를 지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자로 지내고 있던 어느 날 그에게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가 생긴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와 성 밖으로의 여행을 시도한다.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안전한 성에서 벗어나 세계로 향하는 왕자는 그러다 장미를 놓쳐 버리고 만다. 그녀의 기억은 여기까지이다.
이 동화를 떠올리며 그녀는 장미가 없어 추해지더라도 왕자의 연인이 변치 않고 그를 사랑해주길 바란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며 체념해버린다. 그리고 자신의 추한 모습, 연약한 모습, 보잘것없는 모습을 직면할 때마다 어쩌면 자신에게 있어야 할 장미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은 않을까 생각한다. 또, 세상엔 장미를 잃어버린 이들이 많을지 모른다고 상상한다. 그들이 잃어버린 장미들이 모여 묘지를 이루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한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모두 안고 저들끼리 모여있는 쓸쓸한 장미 무덤을 떠올린다.
그렇게 생각하던 그녀에게도 사랑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 순간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당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 안에 불이 켜지는 것 같다고. 아름다운 발광 액체가 되어 당신에게로 흘러가 스며들어 당신이 되는 느낌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그녀에게, 이제 장미의 유무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느껴진다. 마법의 장미가 없어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도, 누군가를 열렬히 좋아해 그녀의 마음속에 켜졌던 그 불빛은 언제까지고 남아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초라하지 않게 빛나면서 말이다.
*아래부터 영화 <코코>의 스포일러가 조금 포함되어 있습니다.
연결된 것 같은 기분을 느껴
예전에 밑줄 그어 기억해 둔 이 문장은 '무언가'를 갈망하다 못해 그 마음이 넘치고 흐르는 때의 순간을 그리고 있다. 소설 속에서는 그 무언가가 어떤 사람이기에 처연함이 더욱 짙게 느껴지지만, 이런 순간은 어떤 '능력'을 간절히 원할 때에도 찾아오는 것 같다.
얼마 전 애니메이션 <코코>에서 나는 이 문장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장면을 만났다. 바로 손수 만든 기타 줄을 맞추며 비밀 다락방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소년 미구엘의 눈빛에서였다. 신발 장인의 가업을 가진 가정에서 태어난 미구엘은 무조건적이고 다른 가족들이 그래 왔듯 신발 장인의 가업을 물려받아야 할 운명을 타고난 소년이다.
그러나 미구엘은 가업이나 전통은 잘 모르겠고, 오로지 음악만을 생각한다. 그는 비밀스럽게 꾸며 놓은 자신의 다락방에서 좋아하는 한 가수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를 테이프가 늘어날 정도로 보고 또 본다. 미구엘은 자신 있게 신발 만드는 것보다는 노래하고 기타 치는 게 좋다고 말할 수 없어서 혼자 다락방에 숨어서 꿈을 키운다. 그의 집안은 단지 가업을 이어야 하는 전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라면 결사반대라는 전통도 뿌리 깊은 집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뿌리 깊은 전통이라지만 미구엘을 막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는 온전한 기타 하나 없고 음악을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지만 온 나라를 들썩이게 했던 전설의 가수의 노래를 들으면 대책 없이 가슴이 뛴다. 그리고 무작정 그의 음악과 자신이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는 강렬한 느낌을 받는다. 자신이 뮤지션이 될 운명을 타고났다고 강렬하게 믿게 되는 열정은, 그에게 불이 켜지는 것 같은 순간들을 가져다준다. 좋아하는 것, 그리고 잘 하고 싶은 것 그래서 바라보고 있으면 내 안에 불이 켜지는 것 같은 무언가가 그에게는 음악인 셈이다.
한편 '좋아함'과 '잘 하고 싶음'의 조합은 조금씩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잘 하고 싶지 않아도 좋아하는 것도 있을 수 있겠고, 잘 하지만 좋아하지 않는 것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다루기 어렵고, 복잡한 감정이 동시에 드는 상태는 좋아하면서 동시에 잘 하고도 싶을 때이다. 그때에는 자주 여러 장애물들이 기다리고 있는 편이며, 그런 마음을 동시에 가지게 되면 괴로워지기 마련이다. 바로 그런 때여서 미구엘은 음악가였던 가족을 만나기 위해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를 넘나드는 위험한 모험까지도 감수하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장미가 사라져도 나에게 남을 것
그런데 무언가를 좋아하면서 동시에 잘하고 싶은 마음은 나를 자주 초라하게 만들었다. 나도 좋아하는데, 나도 잘하고 싶은데 세상에는 나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고, 훨씬 잘 하는 것 같은 이들이 도처에 존재했다. 그들을 마주하면서 나에게는 '내 마음은 그들에 비해 보잘것없는 건 아닐까, 내 실력으로 뭘 어떻게...' 하는 약한 마음들이 자주 일어났다.
물론 여전히 그 마음들을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나도 알고 있다. 좋아해서 가슴을 뛰게 하고 설레게도 만들지만, 잘하고 싶어서 나를 괴롭게도 만드는 것. 그런 것은 대체로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지닐 수 있는 종류의 것들이 아닌 경우가 많다. 왕자가 받은 축복의 선물들이나 이어받은 저주에 걸린 장미꽃처럼 내가 바꿀 수 없는 타고난 것과는 조금 다르다.
물론 영화처럼 죽은 자의 세계까지 가는 모험을 감당하라는 과제를 주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잘하고 싶은 무언가는 내게 크고 작은 과제들을 준다. 나보다 잘 하는 사람들을 좋아해 보기, 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 자주 지켜보기, 따라 해 보기, 연습해보기와 같은 과제들을. 그리고 그 과제를 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좋아하는 마음이다. 나는 괴로운 마음을 동시에 느끼며 어떻게든 잘 해내 보려 안달복달한다. (그러고 보면 이런 사서 고생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를 넘나드는 모험에 비견할 만 한가 싶기도.)
그래서 어떻게 될까? 소설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새드엔딩에 가깝게 끝나는 반면, 영화는 모든 일들이 마법처럼 행복하게 마무리된다. 그럼 이제 나는 어떻게 될까? 실은 나도 잘 모르겠다. 예상컨대 그 결말이 영화는 아닐 가능성이 높고, 소설이라면 꽤 많이 슬플 것 같아서 걱정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 마음은 마법의 장미가 사라지고 나서도 내게 남겨질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을 잘 지켜내는 것, 그 마음들이 주는 과제들을 기꺼이 하나씩 고민해보는 것. 그것은 마법의 장미가 사라져 초라한 모습만 남게 되었을 때 아무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약한 마음을 약간은 더 단단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