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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희 Apr 27. 2020

열등감이 관계에 미치는 영향

타인을 경멸하는 것으로 나에 대한 경멸을 피하지 말자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내가 자신을 '만나줬던 것'이라고 말했던 전 남자 친구가 생각났다. 어쩌면 그와 나를 삼 년이라는 시간 동안 묶어줬던 건, 스스로를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믿었던 우리의 공통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단지 그의 열등감이 나의 열등감보다 더 컸으므로 나는 그를 경멸하며 나에 대한 경멸을 피해왔을 뿐이었다.


(최은영, <한지와 영주> 중)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나를 처음 보는 이들만 있는 곳에서 있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는 아마도 많이 지쳤을 때일 것이다. 최은영의 단편소설 <한지와 영주>의 주인공 영주는 자신이 지쳤다는 것조차 감각하지 못할 정도로 지친 스물일곱의 나이에 이주간의 프랑스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프랑스 리옹 근처의 한 시골 마을의 수도원에 일주일간 머물게 된다. 영주는 일주일만 머물기로 했던 계획과는 달리 수도원에서 일곱 달을 더 보낸다.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니던 그녀는 수도원에서의 시간을 위해 갑작스레 휴학계를 내고, 치열한 한국에서의 삶을 잠시 놓아 버리는 일탈을 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곳에서 평생 잊지 못할 사람을 만나게 된다.


케냐에서 온 한지. 그는 그 수도원에서 영주와 깊이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되는 인물이다. 둘은 함께 수도원 근처의 밤 방문객들이 만드는 소음 공해를 저지하는 '나이트 가드'봉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진다. 영주는 한지와 수많은 이야기들을 나누며 그의 깊은 눈만큼이나 깊이 그에게 마음을 연다.


그건 또한 그에게 하는 이야기들이 그 이외에 어디로도 퍼져나가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조차 용서할 수 없었던 일들도 한지에게 터 놓는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에게 느끼는 감정이 사랑인 줄 알면서도 숨기려 무척이나 노력한다. 그와 그녀 사이에 놓인 현실적인 제약들도 영향을 끼쳤겠지만 그보다도 그녀의 감정을 방해했던 것은 다름 아닌 '열등감'이었다.


한지의 존재와 자신을 비교하며 그가 자신에게 친절했던 것이 혹시 자신을 불쌍히 여겨서이진 않을까 생각하는 영주. 그녀는 한지와 비교하여 자신의 부족함을 생각할 때면 헤어진 지난 연인을 떠올린다.


영주의 전 남자 친구는 그녀에게 늘 자신을 '만나줘서' 고맙다고 하곤 했는데, 그건 자신이 사랑받지 못할 존재라는 강한 믿음에서 나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처음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믿었던 영주 또한, 이후에는 결국 그가 사랑받기에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렇게 그 둘은 3년간의 연애 끝에 아쉬움도 미련도 없이 깨끗하게 헤어진다.



열등감이 느껴질 때 누군가를 곁에 두면 생기는 부작용

영주는 어디에서나 자연스럽고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는 것 같은 한지에 비교해 초라함을 느낀다. 그와는 달리 어디에 있든 우물쭈물하는 자신은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는 누군가 한지와 친하지 않냐고 물어보았을 때, 그렇지 않다고 부인해버린다. 그리고 부인하는 그 순간에도 한지와의 관계가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었기 때문임을 영주는 알고 있다.  


열등감은 자신이 사랑받는다는 것을 자꾸 의심하게 만든다. 사랑받는다는 것을 의심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오는 타인의 정성을 과소평가하다 보니 타인에 뻗을 수 있는 마음의 크기도 자꾸만 줄어들게 된다.


영주의 전 남자 친구의 경우에도 그렇다. 자신을 만나준다는 표현을 반복하는 것은 고맙고 벅찬 감정에서 나오는 말이기보단 사랑이라는 감정 그 자체에 대한 의심에서 왔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이 없어 늘 자신을 낮추면서 시작하는 연애는 초반부터 삐그덕거리기 마련이지만, 이외로 꽤 오래 지속되기도 한다. 상대방도 그와 비슷한 상태일 때가 그렇다.


과거의 연애를 회상하는 영주는 자신이 그를 경멸하며 자신에 대한 경멸을 피해왔다는 잔인한 진실을 인정한다. 상대를 연민하며 시작되는 연애는, 결국 그 연민이 경멸로 변화하고 사랑의 감정까지 앗아가는 순간 소멸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기까지는 꽤 오래 걸린다. 자신에 대한 경멸을 애써 피하는 이들은 자신이 느끼는 진짜 감정이 무엇인지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관계의 끝을 인정하고 결정하는 것에도 자신이 없어 미루고 미루다가 시간이 어영부영 흘러가기도 한다.


이는 연애관계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타인의 부족한 점을 기어코 끄집어내 연민 포인트를 찾아내고야 마는 건강치 못한 마음은, 사실 자신의 부족함을 감추기 위한 깊은 열등감에서 비롯된다.




자존감은 열등감의 반대말이 아니야

이번에는 열등감의 반대편의 상태를 표현할 때 자주 쓰이는 '자존감'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자존감이 높다'는 것은 대체 어떤 상태일까? 자존감이라는 단어는 최근 몇 년간 유행처럼 번졌고, 모든 일의 흥망성쇠가 '자존감'에 달린 듯 그와 관련된 각종 글과 이론들이 쏟아져 나왔다. 거의 모든 일의 실패나 성공의 원인이 모두 자존감이라는 만능키에 달렸다고 이야기하는 듯했다. 일적인 성취나 학업 그리고 인간관계와 연애, 심지어 아침에 일찍 일어날 수 있느냐 하는 것까지도 말이다.


자존감은 물론 무슨 일을 하든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자존감이 열등감의 반대편에 있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존감은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단언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내게 있는 부족함이 그대로 인정될 때 안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게 열등감이 있음을 잘 이해하고 있을 때, 그래서 타인의 부족함도 나의 부족함만큼이나 당연한 것이라는 걸 받아들일 때 자존감이 높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오히려 자존감과 열등감은 가까운 감정일 수 있다. 내가 나의 열등감을 알고 있을 때, 그래서 타인의 열등감을 보고도 경멸하지 않는 순간 마음과 관계는 더 건강해진다.


나의 결핍에는 꽤 다양한 결과 높낮이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건 타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술자리에서 농담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약간 쪽팔리지만 이야기하기 편한 결핍도 있다. 그런가 하면 정말 누구에게도 말하기 어려운, 나 조차도 바로 보기 어려워 무의식적으로 애써 피하게 되는 그런 결핍도 있다.


나와 타인의 서로 다른 높낮이의 결핍들을 쉽게 판단해 연민하거나 경멸하지 않고 그저 그냥 바라볼 수 있다면, 관계 맺음은 조금 더 성숙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상대를 경멸하며 나에 대한 경멸을 피하는 그런 위태로운 관계를 더 이상은 맺지 않도록 하자.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자존감을 높인답시고 내게 있는 결핍들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아야 한다. 무엇이든 그대로 보려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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