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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희 Apr 06. 2020

네가 가져다준 내면의 묘한 자국

어떤 존재를 마음에 기르는 것에 대하여

흰 개가 물끄러미 찬성을 올려다봤다. 살짝 경계하는 눈치나 눈에 힘이 없었다. 찬성이 용기 내어 한 걸음 더 다가갔다. 흰 개가 찬성 주위를 빙그르르 돌며 찬성의 몸 냄새를 맡았다. 그러곤 뭔가 결심한 듯 찬성의 손바닥에 코를 대고 킁킁대다 혀를 내밀어 얼음을 핥았다. 순간 물컹하고, 차갑고, 뜨뜻미지근하고, 간지럽고, 부드러운 뭔가가 찬성을 훑고 지나갔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찬성이 두 눈을 깜빡였다. 이윽고 개가 얼음을 날름 입에 넣더니 와삭와삭 씹었다. 와사삭- 와삭- 청량하게 얼음 부서지는 소리가 찬성 귀까지 다 들렸다. 찬성이 손바닥을 가만 내려다봤다. 얼음은 사라지고 손에 엷은 물자국만 남아 있었다. 동시에 찬성의 내면에도 묘한 자국이 생겼는데 찬성은 그게 뭔지 몰랐다. 개가 희고 긴 속눈썹을 치켜올려 찬성을 바라봤다. 찬성이 서둘러 컵에 다시손을 넣었다. 두 해 전 일이다.


(김애란, <노찬성과 에반>, 바깥은 여름, 47-48쪽.)




개가 희고 긴 속눈썹을 치켜올려 찬성을 바라봤다. (Photo by Zoe Ra on Unsplash)


김애란의 단편 <노찬성과 에반>은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 집에서 살게 된 어린 소년 찬성이 에반이라는 강아지를 기르게 되면서 겪는 이야기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찬성은 휴게소 졸음 쉼터에서 커피를 팔던 할머니 옆에서 무료한 시간을 견뎌야 했다. 에반은 졸음 쉼터 근처에서 울거나 떼를 쓰면 안 된다는 교훈을 가장 먼저 배워야 했던 찬성이 휴게소에서 만난 하얀 개다. 처음부터 찬성이 에반을 집에 데려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찬성은 오래전부터 휴게소에 버려진 개들을 자주 목격해왔고, 그들이 죽어라고 주인의 차를 달려가던 모습도 보았다. 그리고 그 개들의 검은 눈동자에 담겨 있던 주인을 향한 미움이나 원망이 아닌, '내가 뭘 잘못한 걸까' 하는 질문과 자책까지도. 또 그들이 앞으로 어디로 가는 지도 어렴풋이 알고 있던 찬성은 안타깝지만 언제나 그랬듯 애처롭게 숨을 헐떡이는 에반도 그냥 지나치려 했었다. 하지만 목이 말라 보이는 그 개에게 물이라도 주자며 갖고 있던 음료의 얼음을 손에 쥔 찬성은 경계하는 에반에게 다가선다. 그리고 에반은 찬성의 손바닥 위의 얼음을 와사삭- 먹게 되는데.


그 순간의 장면이 바로 오늘의 소설 같은 소리로 꼽은 장면이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이들은 어렴풋이 느껴질 '내면의 묘한 자국'이라는 표현 말이다.



뽀뽀와의 만남


1살쯤의 뽀뽀 어린이 시절



지금은 윤기 나는 오묘한 은색 빛의 털을 가진 뽀뽀는, 처음 만났을 때 새까만 짧은 털로 뒤덮여 있었다. 거의 성인 손바닥 만한 크기였던 앙증맞은 생명체를 처음 보고는 얼핏 보면 까만 털실뭉치로 보이겠다고 생각했다. 새까만 털에 가려 눈과 코도 멀리서 보면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으니.


처음에 그는 우리 가족이 기르기로 했던 강아지가 아니었다. 아니 사실 집에서 강아지를 키우게 될 줄은, 뽀뽀가 우리 집에서 하루 자게 된 그날까지도 상상해본 적 없었다. 


뽀뽀는 고모께서 분양받으신 강아지였다. 동네 골목에서 작은 미용실을 하시던 고모는 뽀뽀와 같은 종류의 강아지가 죽은 후, 다시 같은 종류의 강아지를 분양받으셨다.


분양의 절차를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개가 태어난 후 최소 6개월은 어미와 함께 있는 것이 좋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뽀뽀의 경우 그 이전에 분양된 듯했다. 갓난 새끼의 상태로 어미와 떨어져 잘 걷지도 못했던 너무나 작은 생명체. 새끼 강아지를 키우게 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고모를 찾아 처음 본 뽀뽀는 정말 작고 귀여웠고, 작은 생명체가 주는 무해한 따뜻함은 모든 이들에게 통할만 했다.


그 무렵 골목길을 누비던 동네 꼬마 아이들은 가끔 고모의 미용실을 들르곤 했다. 손님이 없어 한가할 때 고모는 동네 애들이 보이면 가게로 불러 사탕이나 젤리 같은 것들을 한 움큼씩 쥐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미용실 새끼 강아지를 본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이 소식을 들은 아이들은 하나 둘 늘어났다.


너무 귀엽다. 미쳤어. 짱 작아!


너도나도 강아지를 한번 보겠다며 모여든 아이들로 안 그래도 작은 미용실은 붐볐다. 아직 어리니까 이렇게 오래 놀지는 못 한다며 고모가 타일러 보내려던 그때, 한 번만 안아보겠다고 손을 뻗은 아이가 강아지를 안다가 그만 떨어트리고 말았다. 크게 놀라셨지만 높은 곳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었고, 당시엔 아무 이상이 없기에 괜찮은 줄로 아셨다고 했다.


하지만 그날 밤이 되자 강아지는 이상한 증상을 보였다. 빙글빙글 돌고 아픈 신음소리를 내었던 것이다. 늦은 밤 고모는 숨을 헐떡이는 뽀뽀를 안고 우리 집 옆에 있던 24시 동물 병원에 급하게 오셨다. 수의사는 강아지의 상태를 보고 뇌에 충격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며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50프로의 확률이라고 했다. 응급처치를 다 받고, 이제는 링거 주사를 맞으며 안정을 취해야 했던 뽀뽀는 가까운 우리 집으로 옮겨졌다.

 


아픈 뽀뽀가 한 다리 전체에 링거 주사를 꽂았다


나는 쌕쌕 아픈 숨을 쉬는 뽀뽀를 걱정스레 지켜보았다. 그러면서도 강아지는 링거를 이렇게 맞는구나 같은 생각 따위를 동시에 하기도 했다. 이 작은 존재가 50프로의 확률로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재수생이었던 나는 집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때의 내가 가장 간절하게 열중하던 일은 수능 공부였지만, 아픈 뽀뽀가 온 후 도저히 공부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조금씩 눈빛이 살아나는 뽀뽀


방을 들락거리며 중간중간 뽀뽀의 상태를 보았고, 수액의 양을 체크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안정되는 숨소리를 들으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간절히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제발 살려주세요.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며칠 후 중요한 모의고사가 있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내 앞에 무력하고 무해한 작은 존재가 아파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뽀뽀를 지켜보면서 작은 몸에 남아 있는 온기가 차갑게 식어버릴까 봐, 얼마나 전전긍긍했는지 모른다. 다행히도 뽀뽀는 빠르게 회복했고, 다시 찾아간 동물병원에서는 '이제 살았네요'라는 안도의 대답을 들었다. 그 일이 있은 후 고모는 뽀뽀를 기르기에 가게는 좁고 위험할 것 같다 하셨다. 그렇게 뽀뽀는 갑작스럽고 자연스럽게 우리 집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 것이다.


귀를 자유롭게 접었다 폈다 하는 게 뽀뽀의 개인기


여전히 그때의 후유증인지 원체 약하게 태어났는지 조금 자주 아프기도 하지만, 그래도 씩씩하고 활발하게 잘 자라준 뽀뽀씨를 보며 생각한다.


코는 촉촉 눈은 초롱초롱한 뽀뽀씨


50프로의 확률로 내 곁에 있는 네가 그때 나에게 남겨준 묘한 그 자국. 


그것이 어쩌면 삭막하게 공부만 생각하며 말라갈 수도 있었던 그 시기를 버티게 해 주었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그것은 나를 강하게 만들겠지만, 또 언젠가는 가장 약하게도 만들 무언가라는 사실을 아프지만 천천히 받아들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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