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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희 May 22. 2020

잘 헤어질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

불가피한 이별 앞에서 잘 헤어진다는 것의 의미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재이야. 어른들은 잘 헤어지지 않아. 서로 포개질 수 없는 간극을 확인하는 게 반드시 이별을 의미하지도 않고. 그건 타협이기 전에 타인을 대하는 예의랄까, 겸손의 한 방식이니까. 그래도 어떤 인간들은 결국 헤어지지. 누가 꼭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해. 서로 고유한 존재 방식과 중력 때문에. 


(중략)


어느 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강렬하고 빠른 속도로 휙. 그렇지만 각자 내부에 무언가가 타서 없어졌다는 건 알아. 스쳤지만 탄 거야. 스치느라고. 부딪쳤으면 부서졌을 텐데. 지나치면서 연소된 거지. 어른이란 몸에 그런 그을음이 많은 사람인지도 모르겠구나. 그 검댕이가 자기 내부에 자신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암호를 남긴. 상대가 한 말이 아닌, 하지 않은 말에 대해 의문과 경외를 동시에 갖는.

(김애란, <가리는 손> 중)




잘 헤어지지 못한다는 것


언젠가 어떤 책에서 잘 헤어질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읽은 적 있다. 내게 잘 헤어질 수 있는 사람을 만나라는 조언은, 처음부터 와 닿아 이해되는 조언은 아니었다. 언뜻 이해가 가는 듯했지만 완벽하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시작인 사람을 보면서 끝인 헤어짐을 먼저 고려해보라는 건 뭔가 정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누군가의 헤어짐의 능력을 분별할 수 있는 가능성도 희박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특히 사랑이나 관계에 있어서 그렇다는 걸 요즘에야 깨달았다.) 이해가 아주 늦된 편인 나는 경험한 후에야 비로소 말의 의미를 이해하곤 한다. 이 말도 마찬가지였는데, 나는 과거 어떤 연애에서 잘 헤어지지 못한 헤어짐을 경험한 이후에서야 '잘 헤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깨달은 것이다.


잘 헤어지지 못했던 그 연애는 생각해보면 시작부터 녹록지 않았다. 진짜 내 마음이 어떤지, 뭐가 좋은 건지는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끌려가듯 관계가 이어졌다. 물론 함께 하면 웃음이 많이 나는 사람이었고 점점 더 편해져 애틋해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보통 사람들은 같이 오래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특별한 걸 공유하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힐 수 있었다. 대부분의 연애 관계가 그런 단순함으로부터 출발하기도 하므로 그것이 소중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더 바보 같았고 덜 현실적이었다. 연애도 마치 학창 시절의 우정처럼, 우연히 같은 학급이 된 친구를 사귀듯 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잘 맞는 완벽한 관계 같은 건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이게 퍽 현실적인 연애관이라 믿었다. 그래서 일단 지금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취할 것만 취하며 이것이 이상적인 관계를 위해 양보하고 맞춰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어떤 가치관이나 고민을 이해하지 못할 것을 알아서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해도 웃음코드는 비슷했기에 일상을 가벼운 농담으로 얼버무리며 웃어버렸다.


하지만 맞지 않는 것들에 대한 포기는 실은 영영 포기한 것이 아니었고, 그래서 우리는 점점 더 지쳐갔다. 나는 언젠가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맞춰지겠지 하는 긴 인내심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이 사람이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할 것이고 우리의 관계도 언젠가 완성될 것이라는, 바로 그 생각이야말로 엄청난 이상이었다. 만약 관계에서 무언가 포기해야 할 것이 보인다면 그건 정말 내게도 별것 아니어서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언젠가 맞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며 내려놓는 것들은 언제고 다시 고개를 들어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건지 묻는다. 끝내 포기하지 못할 것이면서 포기한 척 내려놓는 것들은 서로를 병들게 한다. 돌아보니 나눌 수 없었던 고민들의 깊이는 얕아져 갔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가꿔나갈 시간도 빼앗기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된 상태를 못 견뎌했으므로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나 자신이 못나 보였다.




잘 헤어진다는 것



게다가 이런 관계의 패턴은 연애뿐 아니라 다양한 대인관계 속에서도 자주 출몰했다. 처음엔 아주 조금 어긋난 줄 알았지만 가치관이 달라도 너무 달라져 멀어진 오래된 친구, 함께 있으면 재밌어 꽤나 자주 만났지만 그 이상으로 가지 못하여 지금은 약속잡기조차 애매해진 관계들.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는 빤하다. 이 관계들에서 나는 대체로 잘 헤어지지 못했다.


내게 중요한 것들을 내려놓게 되면서 서로의 진짜 세계를 공유하지 못했고, 진짜 세계와 분리된 관계에서는 그야말로 무엇에든 현혹되기 쉬웠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속고 속이기 쉬운 사람이 되었다. 서로의 관계를 가장 좋은 쪽으로 오해하다가 마지막에는 가장 나쁜 쪽으로 오해하여 서운해져 버리는 마음. 그 마음의 사이를 오가며 서로의 고유한 존재 방식에 대해서는 이해하려고도 이해시키려고도 하지 않다가 끝나버리는 관계들의 끝은 예상보다도 더 허무하고 좋지 못했다.


그렇다면 다시, 잘 헤어진다는 건 어떤 걸까? 나는 잘 헤어지지 못한 기억들과 김애란의 단편 소설 <가리는 손>의 어른들의 헤어짐에 대한 설명에서 힌트를 얻어 본다. 오늘의 소설 같은 소리로 인용한 부분은 바로 누군가 물어온 헤어짐의 이유에 대한 질문에 대한 주인공의 답변이다. 소설 속 화자는 어른들의 헤어짐을 이야기하며 서로가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관계는 헤어지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어른들은 헤어질 때 생긴 그을림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누가 꼭 잘못해서가 아니라, 각자 최선을 다했음에도 헤어지는 것은 각자에게 그을음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 구절을 읽으며 나는 이것이 잘 헤어질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서로에게 그을음을 만들지라도 서로 최선을 다해 가까이 가보는 것 말이다.


시작부터 포기한 것처럼(때론 포기하지 않았으면서도) 가까이 가지 않는 그 마음은 얼핏 상처로부터 안전함을 보장해 주는 방법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안전함으로 보장된 관계가 끝난 후 남은 그을음 조차 부재하여 확인할 길이 없을 때, 그래서 어느새 함께 했던 존재임에도 내 삶에서 흔적 없이 깨끗이 잊히고 말 때. 그런 관계야 말로 남긴 것 없어 허무하고 나쁘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 본다. 내겐 그을음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겠다는 마음으로 나를 드러내고 상대방을 들여다볼 용기가 필요했다. 내가 기어코 포기 못할 중요한 가치들이 무엇인지 잘 아는 것이 필요했고, 사실은 없어도 상관없을 외적 조건들이 무언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다.


물론 소설의 말처럼 고유의 존재 방식과 중력을 서로가 완전히 이해하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최소한 서로의 포개질 수 없는 간극을 더 빨리 마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그 간극을 서로 존중하여 기꺼이 껴안고 갈 수 있는 관계라면, 꼭 이별을 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만약 불가피한 이별의 순간이 오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정말로) 괜찮다. 한순간이나마 서로에게 가까이 대어져 봤기에 그래서 서로의 존재 방식을 드러내 보고 이해하려 노력해 봤기에 그다음 관계에서는 좀 더 성숙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적어도 우리는 서로에게 그을음이 되겠지. 실패하더라도 잘 만나고, 잘 사랑하고, 그리하여 잘 헤어질, 내게 끝내 의문과 경외로 남게 될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그러기 위해 일단 나부터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오늘도 당신에게 내 진심을 대어 보고 당신의 진심을 가감 없이 들어줄 용기를 내 볼 것이다.






*본문 중 등장한 어떤 책은 기억을 더듬어 보니 공지영 작가의『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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