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둘레길 4, 5코스
어머니는 집 밖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얌전하고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동네 아이들에겐 마음씨 좋은 아줌마였고 이웃 주민들에겐 사교성이 좋고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친족 어른들에게는 예의가 바르고 순종적이었고요.
제 일과는 그렇게 순종적이고 착한 어머니의 기분 고조에 따라 칼같이 바뀌었습니다.
돌변한 어머니에게 머리채가 쥐어 잡힌 채 방으로 끌려들어가 거의 짓밟히는 수준으로 맞았던 적이 많습니다. 맞는 와중 어머니는 갑자기 숨을 고르고 내 팔과 다리를 부동자세로 있게 합니다. 피하거나 막으면 더 맞는다, 수차례 경고하다가 준비가 됐다 싶으면 주먹을 거머쥐고 자세를 잡습니다. 그래야 자기 주먹이 제 얼굴과 온 신체로 내리 꽂일 때의 쾌감을 온전히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하루 종일 어머니에게 시달리는 하루가 끝나고 침대 위에 눕고 나면 온몸의 근육의 긴장이 풀리면서 끝 간 데 없는 잠이 속절없이 쏟아졌습니다.
어머니는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저를 다시 깨워 고압적으로 책상 앞에 앉힙니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는 절 괴롭히는데 만큼은 참 부지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오랫동안 불교를 믿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핵심 논리가 바로 자비와 집착을 놓으라는 가르침인데 어머니는 저를 괴롭히는데 그토록 집착했으며 제 삶에서 가장 무자비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저에게 그녀만큼 위협적인 존재는 없었습니다.
그녀는 왜 절로 찾아가서 그렇게 수많은 기도를 드렸던 걸까요. 절에 가서 뭘 보고 배운 걸까요.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거기서는 누군가 누구를 억압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는데 말이죠. 스님과 보살들에게 보이던 그 잔잔하고 인자한 미소와 순종적인 태도가 집안에서의 저에 대한 태도와 극명히 대비되었습니다. 그녀는 절에 갈 때마다 부처의 자비가 아니라 많은 이들이 절대 시 하는 부처의 권위를 스스로 체득해 온 걸까요.
집 안에서 가장 큰 권위를 가지고 있던 아버지는 평소 집의 청결에 집착했습니다. 그는 자기 주변이 항상 깨끗이 청소되어 있어야 하고 정리정돈이 말끔히 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본인이 직접 나서서 집안 청소하는 걸 거의 본 적이 없는 데다가 늘 제대로 씻지 않아 곁으로 가면 불쾌한 냄새가 나 코를 틀어막게 만들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청소하는 자세, 밥 먹는 자세, 걸어 다니는 자세, 앉아 있는 자세 하나하나까지 간섭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안 들면 바로 폭언과 손찌검을 가했죠.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일을 하러 나가기 전 제 책상 서랍과 외투 호주머니도 수시로 뒤졌습니다. 나쁜 길로 새지 않는 바람직한 장손, 장남, 그리고 자식의 모습을 기대했던 걸까요. 저는 항시 매사에 예의범절을 지키는 의젓한 자세로 아버지 앞에 존재해야 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인간에 대한 예의범절을 중요시하는 유교적 사유방식을 생활양식으로 삼던 아버지가 왜 오랜 기간 동안 노름과 외도에 그토록 깊이 빠져 있던 건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는 평소 당신이 지향하는 가치관과 전혀 반대로 살고 있던 걸까요.
그는 자신 주위의 청결에 필요 이상으로 집착했지만 정작 자신의 지저분하고 방탕한 본모습에 대해서는 청결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는 왜 앞뒤가 맞지 않는 자신의 실제를 균형 잡힌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했던 걸까요.
아버지는 노름으로 엄청난 빚을 지고 가족에게까지 그 고통을 전가시켰지만 가책은 전혀 느끼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가족구성원으로서의 자식 된 도리, 그렇게 어머니와 자녀들에게 각자가 책임져야 할 본분에 대해 늘 강조했지만 정작 자신이 져야 할 가장의 책임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습니다.
집 안의 가난은 제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그전에는 크게 유복하지는 않더라도 경제적으로 최악의 상황까지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어머니는 파출부, 식당일, 목욕탕 청소를 해가며 형제들의 학원비를 댔습니다. 저는 미술학원, 피아노 학원, 속셈학원, 컴퓨터학원, 서예학원 등을 번갈아 다녔고 어머니는 방문학습지를 신청해 집에서까지 집중적으로 수학하도록 했습니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자식들이 커서 잘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렇게 수많은 학원을 보냈겠지만 그 방식이 굉장히 강압적이었고 덕분에 숨 막히는 양의 과제와 숙제를 매일 떠안아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불교뿐만 아니라 사주와 점에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서 제가 법조계 인물이 될 거라는 말을 듣고 와 더욱 다그치듯 공부를 시키게 만든 것도 한 요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때 본인 스스로 열심히 발품을 팔아 공부시켰지만 원하는 결과만큼 성과가 나지 않으니 그 책임이 순전히 못난 저에게 있다고 단정 짓고 더욱 악독하게 대했던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외도와 남녀 차별적인 가부장제의 지속적인 억압, 밤낮 가리지 않는 상시적인 빚쟁이들의 출몰에 이르기까지 본인이 상상했던 가정의 이미지가 산산조각 나자 아버지의 리틀 아바타인 동시에 상대적 약자인 저에 대한 미움이 더욱 노골적으로 표출되었던 것 같습니다.
집안에서 어머니의 주도로 저를 향한 마녀사냥이 해가 갈수록 심화된 것이죠.
하지만 어머니는 그 와중에도 오히려 아버지로부터 인정 욕구를 느끼고 싶어 하는 행동을 많이 했습니다.
갑자기 제 발 저리듯 시작된 아버지의 심한 의처증과 가정 돌보기에 무심한 태도 때문에 서로 싸운 적도 많지만 전반적으로 늘 그를 위해 맛있는 밥을 차리고 살갑게 대화하려 애쓰고 아버지의 아내로서 그가 요구하는 걸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베풀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둘 사이가 안 좋아질 때마다 불량하고 나쁜 아이로 낙인찍혀 있는 저를 공통의 적으로 삼아 번갈아 때리며 화해를 도모한 적도 적지 않죠.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간의 관계를 단절시키지 않고 어떻게든 유지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던 것 같습니다. 특히 어머니 쪽에서 말이죠.
그런데 어머니는 왜 나와의 관계를 아버지처럼 회복시키려고는 하지 않았을까요.
정작 어머니의 삶을 그 긴 시간 동안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장본인이 바로 아버지였는데 말이죠.
부모라는 사람들은 늘 돈이 없었습니다. 빚쟁이들이 전화를 하거나 찾아오면 저를 방패막이 삼아 숨거나 피했던 적이 많습니다. 이 모습이 참 기이하게 다가왔습니다. 이 작고 보잘것없어 벌레 취급받는 존재가 빚쟁이들이 들이닥칠 때마다 다 큰 어른 두 명을 보호하는 빛나는 존재로 탈바꿈했으니까요. 그리고 바로 그때가 해방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부모의 폭력이 스스럼없이 다시금 야기될 때 빚쟁이들이 찾아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요. 부모는 빚쟁이가 집안으로 들어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순한 양처럼 다소곳해졌고 저를 향해 임계점까지 치달았던 분노조절장애라는 심각한 병리 증상은 금세 치유 상태로 변모했습니다. 가족을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괴롭히는 빚쟁이들로 인해 역설적으로 그들의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던 거죠.
빚쟁이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부모의 모습에서 묘한 쾌감을 느꼈습니다. 막혀 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고 어쩐지 빚쟁이들이 지원군처럼 느껴지는 아이러니한 안도감이 밀려올 때도 있었습니다.
물론 늦은 밤과 새벽에 기습적으로 현관문을 쾅쾅 두드리는 빚쟁이들이 두렵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집안으로 들어온 그들은 저에게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았습니다. 돈을 갚지 않는 부모에게만 그 책임을 물었습니다.
어린 자식에게 과도한 책임을 강요하는 부모와는 달리 적어도 빚쟁이들에게 아이는 건드리면 안 된다는 확고한 상식 개념이 자리하고 있던 걸까요.
덕분에 어머니에게 학대당할 때마다 빚쟁이들이 집으로 찾아오길 간절기 바랐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죠.
저에게 수많은 갑질을 하면서도 정작 빚쟁이들로부터 갑질을 당하는 본인들의 모습에 제 입장을 대입하여 상대화하지 못하는 부모가 이해 안 되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이러한 사정을 잘 모르고 잘못된 남편 만나 고생하는 사람, 어려운 집안 환경에서도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제 어머니를 불쌍하게 여겼습니다.
반면 그런 어머니를 향해 늘 표정이 어둡게 굳어 있던 저에게 그들은 탐탁지 않은 시선을 보냈죠.
어머니와 아버지 둘 다 자신을 돌아볼 줄 몰랐습니다. 자식의 눈높이에서 바라본 자신의 본모습에 대해 파악조차 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을 객관적으로 상대화하지 못했죠. 본인들의 치부에 대해서는 여지없이 관대했죠. 아니 아예 치부라는 게 존재하고 있는지조차 인식 못 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자식에 대한 흠결이 조금이라도 포착되면 집요할 정도로 그 대가를 똑똑히 치르게 만들었습니다.
자식이 자신들의 소유물이라는 그릇된 지배욕에 온 정신이 사로잡혀 있던 결과였을까요. 그래서 사리분별이 잘 안 되었던 걸까요.
본인들이 단죄하고자 했던 자식의 과오보다 부모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이 얼마나 더 심각한 문제였는지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매번 심한 욕설과 손찌검을 행사하고 집 안을 온통 폭력 속으로 물들이면서도 거꾸로 어린 저를 경우 없는 인간으로 몰아세웠습니다.
그들은 가족이라는 개념을 평등 원리에 기초하여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가정 내에서 언제나 자신들만이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집안에서만큼은 자신들이 옳고 본인들이 내리는 판단은 무흠 무결하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다고 전제하는 듯 보였습니다.
지금도 늘 절에 가서 부처상 앞에 엎드려 빌고 또 빌던 어머니의 모습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절에 갈 때마다 부처를 향해 낮게 엎드리는 자신처럼 저도 항시 저자세로 본인에게 복종하길 내심 바랐던 걸까요.
그토록 절에 자주 다녔던 어머니는 부처의 자비를 배워온 게 아니라 부처가 가진 권위를 습득해 자기화한 후 저를 향해 과시한 걸까요.
마치 학교에서 자신을 억압하는 선생의 권위적인 태도를 그 무엇보다도 학생들이 귀신같이 먼저 습득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
아버지는 제사를 극진히 챙겼습니다.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좁아터진 월세 단칸방으로 옮겨도 수십 명의 친척들을 데리고 와 제사를 지낼 정도로 조상에 대한 예를 갖추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 풍경이 저에게는 그토록 민망해 보이고 수치스럽게 느껴졌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가장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은 할아버지를 싫어했지만 언젠가부터 태도를 바꿔 할아버지를 부단히 챙기며 아들로서 도리를 다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마치 저를 향해 보란 듯이 말이죠.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상을 극진히 챙기는 것처럼 자식들 역시 본인을 극진히 모셔야 한다는 자기 믿음에 사로잡혀 있던 걸까요.
그는 늘 가정의 안녕과 평화보다는 자신의 안위가 더 중요했고 권위적인 가장 이미지가 실추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일 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