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독 막내 고모를 닮았다. 지금은 전보다 좀 더 엄마를 닮았지만 예전엔 모두가 나를 고모의 딸로 생각했을 정도였다. 어린 나는 엄마가 아닌 고모를 닮았다는 이야기가 싫기도 했다. 지금은 신기할 정도로 분위기가 닮았다는 사실에 재미를 느낀다. 이십 대가 된 후 고모의 친구들을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그분들의 혼란스러워하는 얼굴들이 아직도 생각난다. 몇 초의 정적 뒤에 그들은 안도의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유 참 네가 그 조카구나. 나는 경화 언니가 왜 이렇게 젊나 했네!
닮아서 그랬을까? 고모는 내게 많은 걸 전수해줬다. 언어를 배우는 걸 좋아하는 고모는 나도 그 즐거움을 알기를 바랐던 것 같다. 미국 버전 뽀뽀뽀인 <세서미 스트리트>, 성경 이야기를 각색한 만화영화 <베지테일> 같은 비디오를 선물하고, 자기가 참석하는 영어 모임에 유치원생인 나를 데려갔다. 그 낯선 공간에 고모 손을 잡고 들어서던 기억이 생생하다. 거실에 앉아 베지테일 다윗과 골리앗 편을 보며 두근대던 기억도.
내가 초등학생일 때 고모는 인도네시아에서 살게 되었다. 한 번은 두리안이 그려진 엽서와 나무로 조각된 찌짝(인도네시아에 많은 도마뱀)을 보내주셨다. 고모의 삶이 어떤지, 인도네시아에 찌짝이 얼마나 많은지, 내가 어떻게 지내길 바라는지를 그 작은 엽서에 빼곡히 적어 보냈다. 그때는 해외전화가 어려울 때라 나는 그 엽서들을 통해 고모의 목소리를 듣곤 했다. 고모의 영어 이름인 Sarah를 내게 물려준 것도 그 무렵의 일이었다.
고모는 그 후로도 계속 해외에 살았다. 중국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유창한 중국어를 하게 되었고, 내 동생은 그걸 계기로 중국어를 배우게 되었다. 우리 고모는 한국어도 하고 영어도 하고 인도네시아어도 하는데 이젠 중국어까지 해. 그리고 나랑 똑같이 생겼지. 그는 나의 자랑이자 분신이었다. 아쉬운 건 한국에 들어오는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한다는 거였다. 그래서 이따금 고모를 닮은 배우들을 보면 너무 반가웠다.
처음 고모를 닮았다고 느꼈던 배우는 나탈리 포트만이다. 스타워즈 에피소드 1에 나오는 아미달라 공주. 그 공주의 기구한 운명도 매력적이었지만 크게 진 쌍꺼풀이 고모와 똑 닮았다. 시원시원한 코와 각진 턱선도 그랬다. 마치 가족 같은(?) 느낌이 들어 나는 그녀의 상황에 더 몰입하고 공감했던 것 같다. 스타워즈를 많이 좋아하게 된 이유에 그녀도 크게 한몫하지 않았을까.
어릴 적 티비를 틀면 나오는 드라마 중 하나는 <황제의 딸>이었다. 황제 일가의 수많은 여인들 중 고모를 닮은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자오웨이. 옛날에는 그녀의 이름을 조미라고 불렀다. 나는 그녀만 나오면 어! 고모 닮은 사람이다 외쳤다. 나중에 고모가 중국으로 이사를 간 뒤 동네 사람들에게 종종 자오웨이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어떤 택시 아저씨는 자오웨이가 아니냐고 물었다는데 믿거나 말거나.
최근에도 고모를 닮은 배우를 발견했다. 넷플릭스 드라마 <굿 플레이스>에 나오는 크리스틴 벨이다. 이 드라마를 보며 발견한 건 주인공이 고모와 닮았을 때 내가 훨씬 집중한다는 거였다. 유전자의 힘이란(?) 놀랍다. 이제 보니 나탈리 포트만과 크리스틴 벨의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눈꼬리부터 시작되는 큰 쌍꺼풀, 높고 큰 코, 각진 턱선, 작은 키(나랑 고모는 집안에서 가장 작은 키를 담당하고 있다).
막내 고모는 외국에서 50대 중반을 맞이했다. 젊은날 그녀가 나누어준 삶의 즐거움들은 어느새 내 것이 되었다. 옷이나 인형을 주는 대신 새로운 세상을 맛 보여주고, 거기에 눈 뜨게 해 주었다는 건 어린 내가 받을 수 있었던 최고의 선물이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그런 고모의 10년 전, 20년 전의 모습을 볼 때 속으로 반갑게 손 흔들게 된다. 그리고 생각한다. 저 사람도 멋있는 사람이겠구만!
덧. 그렇다고 내가 위 배우들과 닮진 않았다. 나는 고모보다 선이 연하고, 고모는 더 반듯하게 서구적으로 생겼다. 입이 큰 건 비슷하긴 하다.
덧 2. 보통 내가 닮은꼴을 제시하면 사람들이 공감하지 않더라. 내 눈은 너무 관대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