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유는 스물한 살에 나는 서른에
정신을 차려보니 서른이었다. 덩그러니 길을 잃은 것 같은 서른.
졸업 후 직장에서 고군분투한 지 4년, 어느새 “좀 아는” 주니어가 되어 있었다. 삶은 익숙해졌다. 화장실 칸에 앉아 ‘아 오늘은 어떻게 일하죠’ 떨리는 마음으로 기도하던 시간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줄어들었다. 클라이언트들의 거친 언행에도 (거의) 흔들리지 않는 멘탈로 스리슬쩍 업그레이드 되고 있었다. 퇴근 후 대학부 동생들을 만나 밥 먹고 이야기 나누는 것도, 주말 아침 일찍 일어나 북클럽을 하고, 리더 모임을 하는 삶도 무던하게 해낼 정도의 일상이었다. 익숙을 지나 무료에 가까워질 때 새로운 생각들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이렇게 쭉 살아도 되나?”
쿠궁. 아니었다. 지금의 내 삶을 무척이나 사랑했지만, 앞으로도 쭉 이 모습으로 살고 싶진 않았다. 상황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모습에 대한 문제였다.
“아니! 나는 앞으로도 더 성장하고 싶어. 지금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살고 싶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전에,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지?”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삶의 여러 부분으로 향했다. 사랑은 그중 하나였다.
당시 만나던 남자친구는 참 자상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같이 있으면 웃을 일도 참 많았다. 그런데 이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한다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갑갑해졌다. 그는 찬양을 좋아하지만 말씀을 깊게 묵상하고 나누는 걸 어려워했다. 나에겐 말씀을 묵상하고 나누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반면에 나는 그가 굉장히 집중하는 성가대 활동에 대해 그렇게 까지 공감하지 못했다. 어떻게 들으면 참 사소한 문제다. 당시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 정도는 그냥 다름의 한 부분이 아닐까? 이걸로 결혼을 고민하는 건 너무 치졸하고 어리석은 생각이 아닐까?
실제로 그랬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사이엔 그것보다 큰 문제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다름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아 하는 것, 어둠을 꺼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서로에 대해 다르게 실망하고 다르게 체념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할 신뢰를 지키지 못하는 것… 모든 것이 서툴렀고, 그것을 해석하고 대처하는 서로의 방법이 달랐다. 결국엔 이별에 이르렀다.
사랑과 공존은 별개였다. 그것을 인정하기까지 오래 걸렸다. 인정 후에도 꽤 아픈 시간을 보냈다.
그럼에도 그 선택을 후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알고 있었다. 우리는 최선이 아님을. 그렇다면 다른 최선이 존재하는 건가? 글쎄. 어디서 어떻게 그 답을 찾을 수 있는지 몰랐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빚어가시려는 건지 힌트조차 없었다. 아, 한 가지의 말씀은 있었다.
“He put a new song into my mouth”
다윗은 스스로가 한 경험과 고백을 노래로 불렀다. 새로운 노래는 새로운 경험에서 나온다.
하나님이 내게 보여주실 새로운 모습과, 함께 해나갈 새로운 경험들이 있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내가 노래로 흥얼거릴 만큼 명확한 기쁨이요, 찬양의 재료가 될 것이라는 말씀 같았다.
지금은 내가 울며 괴로워하지만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종류의 새 노래가 되는 거군요. 이것이 결국 기쁨을 노래하는 음악의 한 구절이 되는군요. 그럼 나는 이 구절을 한번 온전히 경험해 보겠습니다.
길을 잃은 내가 툴툴 털고 일어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