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데 뭐 하세요,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시골살이-28

by 윤에이치제이



십수 년을 바다가 있는 곳에서 자랐고 지난 한 해는 제주 에메랄드 빛 물결을 꿈결처럼 내내 바라보며 지냈어 그래서일까 서울에서 그랬던 것처럼 지금 이곳 바다가 없는 시골집에서 지내는 동안 가끔은 물빛이 파도가 시선에 펼쳐지는 그 넓고 깊은 크기가 그리웠었지 곁에 있을 때는 존재를 미약하게 느끼다가 멀리 있으면 그리움 속에 꽉 차게 존재하는 것들 참 보고 싶더라 겹겹이 파도치는 게 물결이 아니라 산결인 것 그것도 좋지만 그래도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더라 그런데 다행이지 가까이 바다가 있어서 거짓말처럼 날이 따뜻했던 겨울 어느 날 바다를 보러 다녀왔고 작고 짧은 위로가 되었어


같은 겨울 속에서도 바닷가 마을과 산골 마을은 계절이 달리 느껴진다 물론 바람 부는 날의 바다라면 무시무시하지만 어쨌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곳에서 삶으로써의 이 계절은 좀 혹독한 것 같다는 느낌이다


그런 시골집 겨울의 하나의 위로 한 달 넘게 바람과 햇빛에 잘 마른 곶감 하나씩 빼먹는 게 무척이나 맛있고 재미가 있는 1월이다 요즘은 몰랑몰랑 부드럽게 먹는다는데 나는 젤리처럼 쫀득쫀득한 예전의 곶감이 좋아서 수분 쪽 빠지도록 바짝 말리고 있다 잘 마른 것 하나씩 골라 빼먹을 때마다 맛도 맛이지만 즐거움이 크다 얼마 전에 리틀 포레스트 일본판 한국판 영화를 다시 봤는데 도시에 살며 동경하듯 보았던 그때와 시골집에 살면서 보는 지금은 전혀 다른 느낌이다 그 속에도 곶감 이야기가 나온다 곶감이 달달하게 맛있게 잘 마르라고 조물조물 주물러 모양을 잡아 주는 것과 겨울 추위를 잘 이겨내는 것이 맛있는 곶감의 비결이라고 그러니 일월의 찬 기운과 한낮의 따뜻한 햇빛을 충분히 머금을 수 있게 좀 더 두겠다


지난가을 툇마루에서 잘 말려두었던 뽕잎도 추운 겨울 동안 따뜻하게 우려서 잘 마시고 있다 바싹 마른 잎을 뜨거운 물로 한번 헹궈내고 차를 우리는데 이파리가 다시 살아나고 진한 뽕잎 향이 솔솔 퍼지는 게 참 신기하다 사람들이 시골 살면서 온갖 것을 잘 말려 재미나게 먹고 마시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우연히 발견한 두 개의 하트는 정말이지 인위적으로 만들어 둔 게 아니라 저절로 모양을 낸 것을 발견한 거다 햇빛이 나고 기온이 오르며 눈이 녹으면서 생긴 하트와 드립 한 커피 원두 찌꺼기를 말리려고 부어두다 생긴 하트 겨울엔 별 사사로운 것에 주목하게 되는 것 심심한 계절을 이겨내 보겠다는 무의식의 의지일지도 모르겠다


추운데 뭘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래도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건 책 읽기다 집안에서 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좋아하는 일 그것만으로도 좋은데 최근에 이 즐거움을 함께 나누게 된 이웃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누군가에게 권한다는 것에 대해 일찌감치 터득한 바가 있다 상대가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일종의 강요가 될 수도 있다는 것 이거 좋아 이거 해 봐 이거 재밌어 이거 봐봐 이거 들어 볼래 좋지 좋지 의도는 좋지 그렇지만 상대방의 취향을 고려하지 않고 나의 취향을 받아들여 주길 바라는 것은 한두 번이면 족하다 그게 단순한 취미나 문화를 넘어선 것이라면 특히 정치적이거나 전문적인 소견에 대해서 밀어붙이는 거라면 그건 주입이나 강요를 넘어 감정적 폭력이 될 뿐이고 그래서 상대가 원하지 않는다면 먼저 권하지 않게 되었고 책을 추천하는 것도 다르지 않은 범주의 문제로 생각되었다 물론 상대방이 그게 정말 좋고 도움이 된다며 책을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도 있다 그건 나에게도 설레는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좋아하는 취향을 들키는 일이기도 하다


(프루스트를 좋아합니다)


어쨌든 이곳에서 우연히 책 한 귄 추천해 준 이웃이 오랜만에 책 읽기에 재미를 느꼈다고 했다 잠자던 책세포가 깨어났나 보다 책을 읽는 방법을 다독의 기술을 알려 달라고 했지만 그건 방법이 있는 건 아니지 않겠나 그저 읽다 보면 내가 좋아하는 책 취향이 생기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나만의 기준이 생기고 어떤 식으로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나의 방법들을 찾아가게 될 테니까 나도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그저 기쁜 마음으로 여러 권의 책을 심사숙고해 추천했다 그 목록을 보고서 독서 초보에게는 거대한 산과 같이 느껴진다고 했지만 그 막막함을 급하지 않게 의무처럼 읽어내기가 아니라 천천히 즐기며 마주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책 읽기의 매력에 서서히 스며들었으면 좋겠다 사실 이후의 일들은 나의 바람일 뿐 나의 몫은 아니겠고 어떤 식으로 결론 날지 모르겠고 수긍하고 지켜보는 것 말고 무얼 할 수 있을까 이후의 모든 시간들은 내가 아닌 당신의 몫이니까요


눈발이 날리고 있다 참 기분 좋은 타이밍 잠시 눈을 쉬다가 나도 다시 책 속으로 들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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