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뒷산 답사기 : 뒷산 걷기에 대한 인문학적 사유
고백하자면 나는 길을 잘 못 찾는 편이다.
내 인생의 길 잃기 흑역사를 말하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나는 새로 이사한 집 근처 도서관에 갔다가 수 차례 길을 잃기 일쑤였고, 코 앞의 건물을 찾지 못해서 반대로 걸어가서 택시를 타려던 적도 있으며, 새로 입사한 회사에서 화장실에 갔다가 사무실 가는 길을 찾지 못한 적도 있다.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뒷산도 위험한 곳이 될 수가 있다.
특히, 이제 조금 뒷산 풍경이 익숙해져서 옆으로 난 다른 길로도 한 번 걸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든 시점에서는 더 그렇다.
거의 주말마다 뒷산에 오르면서 조금씩 길도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처음에는 아파트 뒷산에서부터 봄 진달래로 유망하다는 산으로 향하는 산길이 딱 하나인 줄 알았다. 그런데 길이 눈에 익으니 조금씩 다른 갈래 길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매주 산에 가던 어느 날, 나는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로도 한 번 가봐야겠다는 위험천만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길을 잃는 가장 큰 이유를 예전에 스스로 분석해본 적이 있다.
우선 나는 잠시 멈춰 서서 방향을 찾기보다는 빨리 걷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다보니 표지판을 놓치기 일쑤였고, 바로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목표물을 뒤로 한 채 반대로 걷곤 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내가 길 찾기에서만 상상력과 창의력을 무궁무진하게 발휘한다는 것이다. 마치 내가 4차원, 5차원 공간에 있어서 오른쪽으로 가면 왼쪽 편 길이 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나는 내가 가는 길이 지름길이며 반대편 길과 이어질 것이라는 근거없는 믿음을 가지고 길을 걸어가곤 했다. 성질이 급해서 걸음도 엄청 빠른데다가 늘 확신에 차서 원래 방향과 정반대편으로 걸어가곤 하니, 내가 길을 자주 잃는 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
평소에도 이렇게 길을 잃어버리는 나였으니 이제 조금 익숙해지기 시작한 뒷산에서도 그러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나는 풀이 조금 덜 자란 곳을 길로 착각해서 무모하게 헤치고 들어갔으며, 산짐승들이 자주 지나다닌 흔적을 보고 따라 걸어간 적도 많다. 신기하게도 다른 사람 눈에는 안보이는 길을 찾아내는 천재적인 창의성이 나에게만 있었던 것 같다. 게다가 산 속에서 길을 잃으면 계곡으로 내려가지 말고 산정상으로 올라가라고 어떤 등산 만화에서 본 적이 있는데, 나는 ‘길을 잃었으니까, 민가로 내려가야겠군.’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가시덤불을 굳이 헤치고 아래로 내려가다가 완전히 길을 잃은 적도 많다.
항상 걱정거리를 안고 살아가면서도, 나는 가끔씩 대책없는 긍정주의에 휩싸이곤 했는데 등산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산을 가다가 길을 잃은 것 같으면 더 헤매기 전에 뒤로 돌아갔어야 하는데 나는 그대로 직진해서 아예 길을 더 잃어버리는 사단이 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뒷산이라서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설악산이나 지리산에서 이랬다면, 나는 ‘무모한 등산객 실종’ 등으로 뉴스에 났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뒷산이라는 것은 어떻게든 길을 잃다가도 또 길이 나오는 곳이었다. 길을 잃기에는 지나치게 낮고 작은 산이었다. (무론 그렇다고 해서 산이 위험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뒷산도 위험한 곳이 될 수 있다.)
다만, 나는 지금 생각하면 내가 아무 생각없이 직진하느라고 수풀을 헤치고 지나가며 무수한 흔적을 남겼다는 것이 뒷산에게 참으로 미안하다.
장거리 하이커 문화에서는 LNT(Leave No Trace)라고 해서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식으로 자연을 보호한다. 어떤 하이커는 한 곳에서 저녁 식사를 했으면 잠은 다른 곳에서 자는 방식으로 자신의 하이킹이 자연에 남길 흔적을 최소화하기도 한다. 한국의 많은 국립공원에서도 등산로가 아닌 곳으로 들어가서 식물의 생장을 방해하거나 산짐승들을 놀라게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물론 그런 지식은 나중에 책이나 유튜브를 보면서 배우게 된 것이고, 뒷산에서 한참 길 잃기를 즐기며 직진에 직진을 하던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주말이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가보지 않은 길을 가보면서 직진에 직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새로운 길을 탐험하는 것이 즐겁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걷는 것 자체에 취해서 산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저 앞에서 끽끽대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파다닥 도망치는 소리가 났다.
멧돼지였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의 멧돼지였다. 멧돼지들은 내가 자기를 잡으러 달려가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비명을 지르면서 저만치 도망가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내가 들어간 길이 멧돼지들이 다니던 통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힌트는 여기저기에 있었다.
등산로 가장자리에는 파헤친 흔적들이 계속 이어졌고, 동물 발자국이 있었으며, 내가 들어간 길은 사람이 다니기에는 지나치게 좁았다. 물론 나는 파헤친 흔적이 등산 스틱 자국이라고 생각했고, 동물 발자국을 보고 근처에 흑염소를 방목하나보다 생각했으며,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아서 길이 좁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산에서 멧돼지를 놀라게 한 뒤 나는 가지 않는 길을 탐험하는 것을 멈췄다. 멧돼지와 만날게 무서워졌기도 했지만, 내가 어딘가 잘못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해서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썼다. 물론 사람이 적게 간 길이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그 길을 나 때문에 놀라서 까무러칠 멧돼지들을 위해 남겨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내 발에 밟혀서 채 자라보지도 못할 나무들과 그 나무들이 만들어낼 안전한 덤불에서 천적들을 피해 지저귈 산새들을 위해 남겨둔다고 해도 좋다.
가끔씩, 우리는 모험이 필요하긴 하다. 길을 잃고 헤매보는 것도 우리에게는 활력소가 될 수가 있다.
하지만 산에서는 사람들이 가지 않은 길은 가지 않는 것이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