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일 : 설날 풍경

갈비찜을 먹고 난 뒤 이런 생각이 들었다

by 몽상가 J

어릴 적 설날이 되면 어른들께 세배를 올리고 세뱃돈을 받은 뒤, 명절 때마다 큰 아빠가 선물로 주시는 과자 종합 선물세트를 사촌들과 나눠먹으며 윷놀이를 했다. 어른들은 술을 한잔 걸치고 고스톱을 치셨는데, 나는 윷놀이를 하다가도 누군가 점수가 날 것 같으면 호다닥 달려가서 개평을 받았다. 엄마는 그런 나를 여시라고 표현했지만, 꽤 쏠쏠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꽉 막힌 고속도로 위에서 군것질을 하다가 잠에 들었다가 노래를 부르다가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엄마에게 징징거리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엄마에게 뺏기지 않으려고 서랍 깊숙한 곳에 세뱃돈을 숨겨놨던 기억. 지금 불현듯 생각난 기억이 있는데, 한 번은 나무로 된 벽 시계에 숨기겠다고 난리를 치다가 시계가 코 정중앙에 떨어져 코피를 왕창 쏟았었다. 나란 아이는 어릴 적부터 정말 가지가지 했다.


정말 너무나도 오래된 기억들이 이제는 그리운 추억이 되어 버렸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또다시 그렇게 모여 하하 호호 웃기에는 서로의 삶에 치여, 또 새로운 가족들이 생겨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저 단체 메시지 창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아홉 글자로 세배를 대신하는 것이 전부.


나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서 부모님과 간단히 설 음식을 해 먹고, 근처로 바람을 쐬러 나가는 게 전부다. 집에 돌아와 운동을 하고 딱히 할 일이 없어서 잠시 여유를 즐기다가 친구들에게 새해 인사 겸 연락을 돌려보았다.


한 후배는 결혼 적령기에 침대에 누워 있다가 끼니를 꼬박꼬박 챙기는 모습을 보신 부모님께서 세배를 거부하셨다는 웃픈 사연을 전했다. 세뱃돈 받지 않겠다고, 그저 새해 인사만 하게 해달라고 했지만 부모님의 마음은 그게 아니거늘! 너는 왜 모르느냐! 혼자 하는 세배는 더 이상 받지 않겠다고 하셨다는데 남의 일 같지 않아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어머니, 그래도 새해 인사는 받아주세요...


한 친구는 며느리 업무가 끝났다며 홀가분해했다. 아침 일찍부터 시댁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점심이 지나서야 친정집으로 달려가는 중이었는데, 문자였지만 그녀의 들뜸이 느껴졌다. 부모님께 세뱃돈을 달라고 할 거라는 그녀의 포부가 철없이 느껴지기보다는 괜히 애틋했다. 시월드는 어쨌거나 시월드고, 친정집은 그녀 세상일 테니까.


비혼 주의자인 남사친은 새해고 나발이고 오늘은 휴일이니 마음껏 운동을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했다. 널브러져 있다가 저녁이 되면 엄마가 해준 갈비찜과 잡채를 먹을 거라는 나에게 소띠 해인데 돼지처럼 보내고 있다며 산뜻한 막말을 선사했다. 엉덩이를 걷어차고 싶었지만 오늘은 설날이니까 꾹 참아 보았다. 내일 다시 연락해서 산뜻하게 상욕을 해주기로 했다.


나이가 들고, 세상이 바뀌었다. 예전처럼 북적북적 모이는 가족들이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여행을 가거나 각자 가족끼리 조촐하게 보내는 경우가 더 많아진 것 같다. 때문에 명절 분위기가 나지 않아 왠지 씁쓸한 부분도 있다. 자주 보지 못하는 친척들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명절인데... 그럼에도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는 이점은 있다.


공부는 잘하고 있니? 취업은 곧 되는 거니? 결혼은 언제 하니? 노산인데 아이부터 낳아야지 등. 어른들은 왜 이렇게 남의 인생에 관심이 많은지 모르겠다고 하자, 모 방송인이 오히려 관심이 없어서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거라는 명언을 남겼다. 나에게 진짜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말로 안부를 묻지는 않을 거라고. 그리고 관심 있게 지켜본 어른이라면 내 상황을 이미 잘 알고 있기에 그런 말을 함부로 꺼낼 수 없을 거라고. 괜히 할 말 없으니까 꺼내는 말들이 저런 잔소리 모드의 질문인 거라고. 옳소!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더더욱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없어서 설 분위기가 전혀 나지 않는다. 서울에 있는 사람들이 지방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러 갔다가 전파자가 불어나기라도 하면 올해 설은 최악의 설로 기록될 것이다. 서로가 조심하기 위해 각자의 집에서 설날을 보내는 분위기다. 칼로리 높은 명절 음식을 먹은 스스로를 채찍질하기 위해 낮에 뜀박질을 하고 왔는데,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나왔는지. 그런데 삼삼오오 다니는 모습들만 봐도 대가족이 모여 함께 나온 분위기의 가족은 없어 보였다. 그저 점심을 먹고 산책 나온 가족들만 존재할 뿐.


그리고 이건 직업병일 수 있는데, 몇 년 전부터 트로트 열풍이 거세져 365일 트로트를 들었더니, 명절 때면 어김없이 들려오던 트로트가 전혀 새롭지 않다. 예능 프로그램조차 설날 분위기 내기 대실패!


그래도 설날은 설날이니 마무리는 인사로 해보려 한다. 올해 설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보다 '건강하세요.'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듯. 브런치로 소통하는 여러분 모두!


올 한 해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그리고 원하시는 일, 모두 모두 이루시길 기도합니다^^

keyword
이전 17화42일 : 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