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일 : 지레짐작
상대의 감정을 마음껏 오해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부터 종종 연락을 하게 된 사람이 있다. 썸 아닌 썸을 타는 사이인데, 감정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 사람의 하루를 궁금해하고 있다. 하루에 몇 번씩 메시지를 주고받긴 하지만 관계의 정립이 되기 전에 오버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적당한 기류를 주고받으며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어제 촬영을 하다가 굉장히 화가 나는 일이 생겨서 PD와 언성을 높이게 되었다.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보니 서로가 예민해졌겠지만, 가르치려 드는 말투와 통보하듯 말하는 방식이 계속 거슬려서 결국 언성을 높이게 되었다. 강자에게 더 강하게 들이박는 성격이라 여차하면 그만두겠다는 마음으로 그동안 쌓였던 말까지 다 해버렸다. 하지만 촬영을 멈출 수는 없었기에 어느 정도 사태를 진정시키고 남은 촬영을 마무리했다. 밥이 넘어가지 않아 하루 종일 물만 마시다가 촬영장을 빠져나온 뒤 후배는 밥을, 나는 소주를 마셨다. 반 병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퓨즈가 꺼지기 직전, 온종일 그 사람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후배를 보내고 집으로 가는 길, 약간의 취기가 더해진 정신 상태는 그가 왜 연락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혼자 고민하고, 발 동동 거릴 시간에 내가 메시지를 보내는 게 낫겠다 싶어 문자를 보냈다.
"뭐 하고 있어요?"
"집에 와서 쉬고 있어요. 오늘 바쁘다고 했던 날이죠? 일은 잘했어요? 오늘 하루는 어땠어요?"
마치 그는 내 연락을 기다렸다는 듯 연속으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주 중에 만났을 때 알려줬던 어제의 촬영 스케줄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혹여나 내가 일을 하는데 신경 쓰일까 봐 자중했던 것. 괜히 서운하려 했던 스스로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오늘 있었던 속상한 일을 털어놓을까 하다 그런 감정까지 털어놓는 게 그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포기했다.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아까의 속상했던 감정들은 모두 잊혔다. 만약 그와 조금만 더 친했더라면, 아니 사귀는 사이였다면 나는 이미 그의 품을 빌려 칭얼대고 있었을 것이다.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대며. 그런데 그가 내 감정을 느꼈는지 이런 말을 건넸다.
"오늘 고생 많이 한 거 같은데, 집에 가서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푹 자요. 그럼 기분이 조금은 나아질 거예요. 괜히 술 마시지 말고."
이미 술은 마셨지만 굳이 그런 TMI까지 솔직하게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넣어두었다. 그리고 괜히 센 척할 타이밍은 아닌 것 같아서 속상한 거 티 났냐고 반문한 뒤 덕분에 위로가 되었다는 말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나의 지레짐작은 쓸데없는 생각이었고, 그의 지레짐작은 내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한 것이었다. 내가 무딘 건지, 그가 예리한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눈치 빠른 그 덕분에 조금은 편안히 잠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