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이직하기
댕 댕 댕..
저 멀리서 교회 종소리가 들려온다.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어두운 독일의 겨울밤. 가랑비가 내린다. 내일 아침이면 다시 비가 그칠 것이다. 내가 느끼는 유럽에서 살기 좋은 점 중에 하나는 극한 날씨가 적다는 것이다. 밤에 비가 와도 다음 날 아침이면 다시 날이 갠다.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그곳에서 다시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고 있다. 새로운 회사와의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온 날, 독일에서 처음 취직했던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이커머스팀을 맡은 지 3년째 되던 작년 한 해는 한 단계 도약이라는 중요한 국면을 맞았다. 성장이 어느 정도 정체기에 들어갔기에 새로운 성장동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항상 발목을 잡는 것은 재고 관리와 구매 관리였다. SEO 및 SEM 등 온라인 판매 환경을 개선해도 팔 제품이 제 때 공급되지 않아 기회 손실이 많았다. 하지만 회사는 판매 부진에 대한 원인에는 관심이 적었고, 시스템에 찍히는 판매 실적으로만 판단하려 했다. 성장을 감안해 투자해 놓은 고정비는 매달 매출이 목표를 따라가지 못하면 손실로 꼽힐 수밖에 없었다. 재고 관리와 구매 관리의 일부를 해당 부서로부터 넘겨받아 몇 달간 직접 관리하며 어느 정도 안정이 되는 듯했으나, 연말에 조직이 다시 원상 복귀되고 말았다. 작은 회사가 한 단계 성장하기 위해서는 처음 작게 시작했던 경영 마인드를 혁신할 필요가 있는데, 그 벽을 넘지 못하는 듯 보였다. 몇 년 사이에 회사의 규모가 커지자 주먹구구식의 경영 관리가 발목을 잡았고, 결국 3년을 공들여 키워 온 부서가 서서히 무너지는 걸 볼 수밖에 없었다. 독일 정착에 많은 도움을 준 고마운 화사지만 이제 떠날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작년 말 적극적으로 구인 정보를 찾았다. 그중에 카메라 렌즈로도 유명한 Carl Zeiss가 내가 사는 지역에서는 가장 큰 회사라 종종 Job Posting을 유심히 보고 있긴 했는데, 마침 SCM 담당자를 뽑는다. 지금 하는 이커머스와는 좀 동떨어진 분야이지만, 커리어의 시작인 영업 마케팅과 항상 함께 했던 분야라 업무에 있어서는 자신 있었다.
이력서를 정성스럽게 업데이트하고, 커버레터를 작성하고 독일어 번역을 아내에게 부탁했다. 바쁜 아내가 며칠에 걸쳐 어렵게 업데이트를 한 이력서와 커버레터는 내 입맛과는 이미 조금 달라져 있었지만 일단...
웹사이트 Careers 페이지의 지원하기 포탈에 등록을 하고 개인 정보를 입력하고 이력서 커버레터 및 증명서 등을 업로드했다. 잘 접수되었으니 기다리라는 메시지와 함께 접수 확인 메일이 왔다. 매일 메일함을 확인하기를 며칠... 그렇게 한참이 지나도 잠잠하더니, 3주 정도 지났을까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불합격 통보 메일이 왔다.
나중에 느낀 것이지만, 첫째 잘못은 내 이력서 교정을 독일인 아내에게 맡긴 것이었다. 프로페셔널하지 않은 이력서도 물론 좋진 않지만 내 언어로 내 의도를 담지 못한 이력서나 커버레터는 이미 내 것이 아니다. 내가 쓴 이력서는 항상 완벽해 보이기 때문에 교정을 받는 것은 중요하지만, 교정을 받더라도 내 언어로 내가 고쳐야 한다.
큰 회사는 뽑을 생각이 없어도 정기적으로 포지션을 오픈하고 모집을 하는 척을 한다. 실제로 내가 지원했던 포지션도 잡 포스팅 날짜가 10월 초였는데, 내가 지원을 하고 나서 나중에 확인을 해보니 똑같은 내용의 잡 포스팅이 12월 초로 바뀌어 새로 올라와 있었다. 특히 큰 회사들은 구인 쿼터가 있어서 여러 포지션을 새로 날짜만 바꾸어 계속 오픈하면서 적극적으로 구인활동을 하는 척을 하는 것이다. 인사 부서의 팁으로는 연말은 회사의 비용 등을 마무리하는 시기이기에 새로 인력을 잘 뽑지 않는 다고... 그래서 연말은 지원하기 좋은 시기가 아니었음도 팁으로 알게 되었다.
웹사이트의 Career 페이지에 이력서를 직접 올리면 특히 큰 회사들은 어떻게 1차 선정을 할까? 하루에도 수십수백 장의 이력서를 다 검토하기는 불가능할 테니 1차 기계적으로 필터를 한다. 그중에 외국인인 내 이력서가 걸러지기는 어렵지 않지 않을까? 여러 구직 관련 팁을 주는 사이트에서 있지만 기계에게 나를 어필하기보다는 해당 담당자에게 직접 연락을 해야 내 이력서가 읽힐 가능성도 커진다.
어찌되었든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스러웠고, 앞이 캄캄했다.
해가 바뀌고 1월 초, 실적은 떨어지는데 공급은 여전히 제 때 이루어지지 않는다. 보스와 해당 문제에 대해 회의를 해도 발등에 비용이라는 불이 떨어져 있는 회사는 구매계획을 축소할 수밖에 없다. 새 길을 찾아야 한다.
작년 말에 봐 두었던, 크리스마스라 미루어 두었던 회사 목록을 다시 폈다. 두 군데를 정해서 이력서와 커버레터를 해당 회사에 맞게 영어와 독일어로 고쳐 썼다. 완벽한 영어가 아니지만 내 언어로, 수정할 것 투성이인 독일어지만 역시 내 언어로, 독일 아내의 도움 없이 직접 썼다. 이미 내 독일어 실력을 까발리고 시작하는 거라 두려움은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시스템에 올리기 전 담당자 이메일로 먼저 컨택을 했다. 보통 담당자 컨택 정보는 해당 페이지에 있다.
안녕하세요. A 포지션에 관심이 있어 연락드립니다. 저는 현재 B회사에서 C 업무를 하고 있고 이전에는 D회사에서 E 업무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직 독일어가 B2 수준으로 유창하지 않아 걱정이 되지만, 기회가 된다면 이력서를 보내봐도 될지요?
이 번에는 감사하게도 메일을 보낸 두 회사 모두 다음날 아침 바로 답장이 왔다. 시스템의 자동 메일이 아닌 해당 담당자가 직접 쓴 메일이었다.
회사A
저희 회사에 관심을 가져주시고 문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물론 독일어가 중요하긴 하지만 B2 정도 수준이면 저희 경험상 해당 업무를 수행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커버레터와 이력서를 저희 웹사이트 해당 페이지에 업로드해 주시면 검토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회사B
친절한 이메일 감사합니다. 이력서와 관련 서류를 보내주시면 검토하겠습니다. 그리고 언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회사B에서는 실제로 면접에서 언어 때문에 떨어졌지만, 적어도 인사 담당자는 통과했으니... 일단은 목표 달성.)
그날 저녁에 퇴근하고 돌아와 두 회사에 이력서를 보냈고, 그다음 날 아침 두 회사로부터 모두 연락을 받았다. 한 군데는 이력서 검토하고 2주 안에 다시 연락을 주겠다는 친절한 담당자의 연락을 받았고, 또 다른 회사에서는 바로 면접을 보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인상적인 이력서 감사합니다. 면접을 보고 싶은데 해당 부서장 출장 일정 때문에 좀 급하지만 모레 가능할까요?
1차 면접을 위해 준비를 며칠 꼬박 했다. 회사 웹사이트를 꼼꼼히 확인하고 회사 평을 확인했다. 준비를 할수록 회사가 더욱 마음에 들었고, 꼭 붙고 싶어 졌다. 디지털 에이젼시 중 독일에서 4번째로 큰 회사이며 이커머스 분야에서는 독일에서 가장 큰 회사라는 건 준비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3년 전에 시스템, 광고, 컨텐츠, 이커머스 등 디지털 관련 다양한 분야의 회사들이 합병을 해서 새로 설립된 회사인데, 내가 사는 곳에 있던 회사도 그중 하나였다. 그래서 독일 전역에 10여 개 도시에 사무실이 있는 직원 600여 명의 꽤 탄탄한 회사였다.
하루 휴가를 내고 면접 날 아침에는 오랜만에 양복을 꺼내 입고 넥타이를 맸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하며 예상 질문들을 연습했다. 면접에서는 인사담당자와 해당 부서장이 들어왔으며, 커버레터에서도 그랬듯이 내 약점을 먼저 얘기했다. 한국에서는 큰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큰 전략에는 익숙하지만, 에이젼시에서 대신해 주던 작은 디테일들이 약했고, 그 작은 디테일들을 몇 년간 현재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보완했노라고 얘기했다. 약 한 시간 반 동안 진행된 면접이 무사히 끝나고, 며칠 후 2차 임원 면접을 초대받았다.
그런데...
2차 면접 통보 메일에 답을 보내면서, 그저 예의상... 자료 등 내가 준비할 것이 있는지, 그저 예의상 물었는데, 그쪽에서 덥석 물어버린 것이다. 한 특정회사의 신제품 온라인 론칭 플랜을 작성해서 PPT로 발표 준비를 해 달라고 한다. 그것도 영어로... 독일어가 아니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1차 면접이 독일어였기 때문에, 프레젠테이션을 통해서 전문성도 확인하고 영어도 함께 평가하겠다는 뜻이었다. 약 2주 정도 시간이 있었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주변 친구들의 도움을 받을까도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싶지 않았다. 2차 면접은 임원 면접이라 좀 더 일반적인 내용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임원은 들어오지 않았고 오히려 실무자들이 더 들어와 1차 면접보다 더 실무적인 내용으로 진행되었다. 며칠 밤 잠을 줄여가며 만들고 연습한 프레젠테이션을 기반으로 여러 질문과 토론을 했다. 면접이 끝나고 방을 나오는 길에 인사담당자가 웃으며 얘기한다.
이제 끝났네요. 멋진 프레젠테이션이었어요! 곧 연락 갈 거예요!
2차 면접을 보고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지원했던 다른 곳에서 또 연락이 왔다. 면접을 보고 싶단다. 특이하게도 사장이 직접 면접관으로 들어왔는데, 이력서 경력상으로는 좋아 보이지만 실제 언어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고 한다. 간절함이 첫 번째 회사보다 덜해서 준비가 부족했을까? 이 회사는 규모가 조금 작아 로컬 고객과 직접 컨택이 많은데 내 독일어 실력이 조금 부족해 보인다며 사장은 조금 더 고민하고 연락 주겠다며 돌려 말했다. 면접 시간도 30분이 채 넘지 않았다.
뭐... 두 회사를 동시에 다닐 수는 없으니.
첫 번째 2차 면접을 봤던 회사에서 사흘 후에 합격 통보를 받고, 그다음 날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그 날 오후 정든 회사에는 이별을 통보했다. 약 3주 남짓한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담당자 컨택부터 이력서 업데이트, 1차 면접, 2차 면접 그리고 합격통보까지 금세 진행이 되었다. 한국에서 해외 영업 마케팅으로 커리어를 시작해 디지털 마케팅으로 우연히 분야를 옮기고, 독일에서 와서는 영업 마케팅과 디지털 두 경력을 조합해 이커머스를 접하게 되었고, 그리고 이제 업계 1위 회사에서 이커머스 비즈니스 컨설턴트로 일하게 되었다. 아직 첫 출근 전이지만 설렘과 동시에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도 살짝 든다. 내가 알던 컨설턴트 분들은 정말 훌륭한 분들인데, 내가 그 정도 할 수 있을지...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떨리고 살짝 흥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