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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관우림 Mar 29. 2016

#4 - 너와 나의 세상

감옥

글 - 관우림

그림 - 정아 (인스타그램 - lint3113)


새로 이사한 원룸의 창문틀에는 꽃 한 송이가 거꾸로 붙어 있었다. 나는 꽃과 친하지 않으므로 붙어있던 꽃의 종류는 알지 못한다. 내 꽃의 세계는 장미와 닮은 꽃들과 누가 봐도 장미가 아닌 꽃들 두 종류만 있다. 이번에는 장미와 꽤 닮았다. 그래서 장미라고 불렀다. 어차피 쓰레기 인 것을 전에 살던 여자가 떼어서 버리지 않고 그 자리 그대로 두고 갔다. 불과 하루 전까지 이 곳에 살았던 사람. 그 사람을 본 적은 없다. 집을 보러 왔을 때도 그녀는 없었다. 살던 사람이 여자라고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그녀의 방은 누가 올 것을 알기라도 했다는 듯 잘 정리돼 있었다. 많은 집을 돌아봤지만 그렇게 깨끗한 방을 볼 수는 없었다. 책상, 의자, 침대, 책꽂이, 옷장 모두 하얀색이었다. 침대보마저 하얀색이었는데 이 여자가 심한 결벽증 같은 게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그리곤 한쪽에 서있는 거울을 통해 스스로를 훑어보며 어쩐지 불청객이 된 듯하여 서둘러 집을 나섰다. 그때 한쪽에 붙어있던 장미도 본 것만 같다. 실은 봤는지 못 봤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장미는 만지면 바스러질 것처럼 보였다. 이제와 물이 담긴 병에 꽂는다고 해도 예전의 색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거 같지는 않다. 지구 상에 물이 없이 살아가는 생명체는 없다. 그는 한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명체였지만 수분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나서는 더 이상 생명체가 아닌 것이 돼 버렸다. 어느 영화에서 본 대저택 응접실의 사슴 머리 박제는 섬뜩했지만 꽃 머리는 그렇지 않았다. 장미에게는 사슴처럼 눈, 코, 입이 없어서 그런가? 아니면 장미가 창틀에 붙어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게 고정시키는 것이 리본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리본에는 날짜가 쓰여있었다.


2013.12.24 – 2015.12.23

다음은 장미의 리본에 쓰인 날짜를 본 다음 내가 떠올린 이야기.


“여자는 날짜를 적었다. 남자와 여자가 이 집에 들어선 순간부터 여자가 남자를 내려놓은 순간까지. 꼬박 2년. 

2016년이 되고도 세 달이 지났다. 여자는 남자와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져버리고도 장미를 창틀에서 떼어내지 않았다. 여자는 자신 이자고 있는 동안 남자가 방에 들어와 꽃을 떼어버리고 다시 떠나거나 혹은 마음을 돌린 남자가 자신의 옆에 누워있기를 바라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남자는 여자를 아직 잊지 않았다는 말이니까.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기대한 일들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란 걸 깨닫고 나서 여자는 더 이상 그 집에 살 수 없다는 것 역시 깨달았다. 

여자는 남자에게 장미 한 다발을 선물로 받았다. 여자와 남자가 처음 만난 건 어떤 모임에서였다. 그 날은 2013년 12월 21일의 밤이었다. 처음 둘의 거리는 꽤 멀었다. 테이블 한쪽 끝에 여자가 앉아있었고 남자는 여자의 반대편에 있었다. 남자는 생각했다.

‘저 여자와 친해지는 것은 어렵겠어.’

하지만 역시 어떤 사건이 발생하는 데 있어 사람의 의지는 크게 작용하지 않는다. 내가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 나를 바라봐 주기를 바라지만 나를 좋아해주는 것은 내가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 아닌 것처럼.

사람들이 자리를 옮겨 다니며 친분을 쌓는 동안 여자와 남자는 큰 움직임 없었다. 자리를 뜨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둘을 옆으로 밀고 있었다. 누군가 남자에게 말했다.

“옆으로 좀 가봐”

그리고 여자에게도 말했다.

“왜 여기에만 있어?”

여자와 남자는 그렇게 만났다. 둘은 꽤 잘 통했으며 그래서 모임이 파한 후에 둘은 따로 만날 것을 약속했다.

남자는 여자에게 장미를 선물할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함께 길을 걷다 지나친 꽃집에서 여자는 장미를 발견했고 장미를 가지고 싶어 했다. 남자는 꽃 선물이 번거롭다고 여겼다. 누군가에게 꽃 선물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꽃 선물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귀찮다고 생각하게 됐고 귀찮게 생각했기 때문에 꽃 선물을 해본 적이 없었다. 어떤 것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다. 

둘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함께 밤을 보냈다. 그녀의 집에서 밤을 새워 음악을 듣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하루가 또 지나갔다. 2014년 12월 24일.

“나 꽃 처음 사봐.”

남자가 말했다.

“그럴 리가! 거짓말. 전에 만났던 여자들한테는? 졸업식, 입학식 따위도 안 가봤어?”

여자가 물었다.

“응 전혀. 졸업식은 가봤지만 꽃은 산 적 없어. 왠지 아까워.”

“아깝다니!.”

“……”

“그럼 이 꽃 더미는 의미가 깊은 거구나! 이렇게 하자. 이 꽃들 중 한 송이를 붙여 놓고 마를 때까지 함께 있는 거야. 이 방에서! 하루고 이틀이고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그래도 설마 지 주제에 한 달을 버티겠어?”

“그 전에 둘 중에 한 명이 이 방을 나가고 싶어 하면?”

“그럼 우린 더 이상 만나지 않는 거지. 그 정도도 함께 보내지 못하는데 만나서 뭐해!”

“그러네! 네 말에 동의해!”

남자는 여자와 함께한 지난 이틀 간의 시간이 좋았다. 이 방을 굳이 벗어나지 않아도 서로만 있으면 될 것 같았다. 두 사람은 함께 책을 읽었고, 함께 영화를 봤다. 서로의 머리를 감겨주기도 했고 말려주기도 했다. 이빨을 닦아주기도 했으며 옷을 입혀주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엔 항상 사랑을 나눴다. 마지막 남은 힘은 사랑을 나누는 일에 다 써버렸다. 그들은 어느 한쪽이라도 힘이 남아 있는 것을 그냥 두지 않았다. 그렇게 한바탕 하루를 보내고 나면 잠을 잤다. 자고 일어나면 둘은 다시 혈기가 가득해졌다. 침대를 떠나지 않는 날도 더러 있었다. 식사는 규칙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하루에 한 끼는 항상 먹었다. 

굳이 장을 보러 나갈 필요도 없었다. 전화나 인터넷으로 필요한 물건을 주문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들은 종종 포테이토 피자를 시켜먹기도 했다. 포테이토 피자는 여자가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감각의 제국이란 영화 알아?” 

여자가 물었다.

“응! 알지. 밖에선 전쟁이 났는데 주인공들은 서로만 보잖아.”

남자가 답했다.

“우리, 그 영화 주인공들 같아.”

여자가 다시 말했다.

여자의 집은 6차선이나 되는 대로의 변에 있었다. 그리고 그 길은 언덕이었다. 내려가는 오토바이는 속도가 붙어 쌩하며 쿨럭 댔고, 올라가는 11톤짜리 트럭은 힘에 겨워 소리를 끓었다. 소리는 어느 쪽이든 듣기 좋은 편은 아니었다. 시끄러웠다. 창문을 열어놓으면 세상은 더 커졌다. 건물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도 들렸다. 통화소리, 대화 소리, 혼자 중얼대는 소리까지. 세상은 그들 바로 옆에 있었지만, 그들은 세상 안에서 세상 밖의 삶을 살았다.

아주 가끔 비가 내린 새벽이면 물에 젖은 아스팔트 덕에 소리가 연해지기도 했다. 그러면 남자는 여자의 등을 토닥이며 어떤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 들도 싸우기는 했는데 다른 사람이 그 들의 싸움을 봤다면 유치하다고 생각할만한 것들이었다. 

달이 여러 번 뜨고, 또 같은 수만큼 해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남자는 여자가 좋았다. 남자는 여자를 자신 안에 넣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꼭 껴안았다. 힘을 세게 주었다. 하지만 여자는 여전히 남자의 바깥에 있었다. 그들은 힘을 아무리 세게 주어도 좁혀지지 않는 거리를 줄여가야 했다. 억지로 힘을 준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여자에게는 자신만의 질서가 있었다. 이를테면, 책꽂이의 책은 같은 높이로 정렬이 돼있어야만 했다. 화장품은 첫 번째 서랍, 화장 솜은 두 번째 서랍, 머리 빗은 세 번째 서랍, 드라이기는 네 번째 서랍, 응급약은 다섯 번째 서랍에 있어야만 하는 식이었다. 집이 온통 하얀색 가구뿐인 것도 여자의 질서 때문이었다. 여자는 규칙이 흐트러지지 않길 바랐다. 여자는 작은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남자는 여자를 껴안은 팔에 힘을 조금씩 뺐다.

그렇게 함께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둘 중 누구도 헤아리지 않았다. 배터리가 나가 남자의 휴대폰이 꺼져버린 것도 오래전이다. 남자의 휴대폰이 멎어버린 날 여자도 자신의 것을 꺼버렸다. 하지만 장미는 마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르기는커녕 시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꽃잎은 생기를 얻어갔다. 남자는 어느 날 아침 장미 이파리에 맺힌 물방울을 발견하고 새벽이면 창틀에서 떨어져 싱크대로 걸어가는 꽃송이를 상상하기도 했다. 남자는 금세 고개를 저었고 자신의 상상력이 바보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 바보 같음을 반가워했다. 

“우리 얼마나 같이 있었을까?”

남자가 먼저 물었다.

“글쎄.”

여자가 답했다.

“우리 너무 오랫동안 시간을 보낸 거 같아. 각자 할 일도 두고.”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이 방을 나가면 우리 헤어지는 거야!”

여자의 반응은 남자가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남자는 여자의 반응에 당황했다. 

한동안 둘은 말이 없었다. 방은 조용했다. 이따금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는데 그 소리는 마치 파도 소리와 같았다. 언젠가 이 소리를 들은 여자는 남자에게 바다가 보고 싶다고 말했다. 남자는 여자에게 함께 바다를 보러 갈 것임을 약속했다.

“바다 보러 갈까?”

다시 말을 꺼낸 건 남자였다.

“……”

여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지난밤에 우리 바다 보러 가기로 했잖아?”

“……”

여자는 남자의 말에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여자의 눈을 보는 듯하면서도 여자 뒤의 벽지에 초점을 맞춰 지루함을 해소했다. 벽지는 규칙이 없는 듯 보이지만 일정한 규칙이 있는 무늬로 장식이 돼 있었다. 꽃무늬인지 구름무늬인지 물방울무늬인지 체크무늬인지 줄무늬인지나무결무늬인지. 무늬에는 그 모양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여자의 방에 붙은 벽지 무늬는 그 이름을 알 수 없었다. 남자는이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벽지를 설명할만한 단어를 찾으려고 했다. 찾을 수가 없었다. 여자의 침묵에 수 분 동안 방이 소리를 잃어버리자 남자는 다시 단어를 고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남자는 자신이 단어를 찾는 이유가 궁금해졌지만 그 이유마저 찾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알게 됐다.

“이 정도 함께 보냈으면 충분하잖아. 감옥도 아니고.”

남자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감옥? 너는 여기가 감옥 같니?”

한동안 말이 없었던 여자가 말을 되찾았다.

“그게 아니잖아. 이제 서로 해야 할 일을 할 때라고! 이 정도면 너나 나나 상대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했을 거야.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라고!”

남자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제 소리도 지르는 거니? 알겠어. 여기서 나가고 싶으면 그렇게 해. 감옥 같다는 대. 내가 어떻게 말려.”

여자는 차분해졌다.

“그런 거 아니라고.”

남자는 자신을 가다듬었다.

“싫어. 저 장미가 말라죽을 때까지 난 이 곳에서 나가지 않을 거야.”

여자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왜 안 나가려고 하는 거야?”

남자가 다시 물었다.

“밖이나 여기나 같을 거야. 너랑 나랑 같이 있는 이 방이 감옥 같으면 나가서도 마찬가지 일거야. 여기는 작은 감옥. 세상은 큰 감옥. 뭐가 달라?”

여자가 답했다.

“이제는 삶을 살아야지. 각자가 살아야 할 삶을 말이야. 돈도 벌고. 그러다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가고. 친구들도 만나고. 여행도 가고. 응?”

남자는 여자의 말에 적절한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 머리를 땅으로 향한 채 창틀에 붙어있는 장미가 어쩐지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나저나 저 꽃은 왜 마를 생각을 하지 않을까? 오히려 싱싱해져.”

남자는 꽃을 보며 말을 돌렸다

“글쎄. 더 오래 살고 싶나 보지.”

여자는 꽃을 보지 않았다. 

“신기하네.”

남자는 여자와 자신이 좁혀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말을 멈췄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다. 그들은 헤어졌다. 이후에도 여자와 남자는 계속 부딪혔다. 밖으로 나가자는 남자와 안에머무르자는 여자. 남자는 여자와 함께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여자는 남자만 있으면 다른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남자도 여자의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여자의 집 앞까지 갔다 가고 개를 흔들며 발을 돌린 기억도 여러 번이다. 여자와의 거리를 좁힐 자신이 없었다.”

2013.12.24 – 2015.12.23

‘그럼 남자가 돌아올 수도 있는 건가? 남자가 돌아오면 나는 뭐라고 말해줘야 하는 거지? 이사를 갔다고 말해야 하나? 나는 여자가 어디로 가버렸는지 모르는데.’

따위의 걱정을 했다. 

새 집에 들어와 짐을 풀고 책상, 책장, 침대, 소파 들을 각자가 한동안 머물러야 하는 자리에 몰아넣으니 밤이 꽤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있었다. 장미는 떼어버리지 못했다. 

‘나머지는 내일 하자.’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니 어렵지 않게 잠이 들었다. 꿈을 꿨다. 꿈에서 누군가 장미 앞에 서 있었다. 키가 컸다. 나는 그 사람을 불렀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손을 뻗으려고 해도 손이 도무지 뻗질 않았다.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에 힘을 넣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그 혹은 그녀가 몸을 틀어 현관으로 나섰다. 문 쪽으로 걸어가는 그 혹은 그녀를 누군가 불렀다. 그 혹은 그녀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봤다. 적어도 그 혹은 그녀를 불러 세운 게 나는 아니었다. 나는 그 혹은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쪽으로 고개가 돌아가지 않았다. 몸을 돌리려고 힘을 주다 잠에서 깨버렸다. 그리고 장미가 붙어있는 창틀을 봤다. 장미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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