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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팡팡이 Mar 31. 2016

30. 내가 너에게 시간을 선물해도 될까?

내가 가장 눈부신 날에 홀로 떠날거야

  그를 만난 건 여행지였다. 시끌벅쩍한 게스트하우스에서였다. 내내 혼자 다닌 여행에서 매운 고독을 맛보았을 때, 마음의 면면들이 무너짐을 알아차렸을 때, 그곳에 들르게 되었다.

  부산에는 오래된 고향 친구도 있었겠다, 바다도 있었겠다, 고독을 이리저리 치우고자 친구와 한잔, 두잔. 그 흥을 이기지 못해 여행동안 사온 명물 막걸리를 꺼내며 게스트하우스에서 또 한잔. 그 맛을 전해주고 싶어서 고독히 앉아 술을 마시는 분에게 또 한잔. 그렇게 술판이 벌어졌고, 게스트 하우스의 모든 사람들이 모여 술을 마시게 되었다.


  12월 30일. 우리는 각자 가지고 온 술들을 꺼내며, 안주를 꺼내고,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1년의 마무리를 하루 앞당겨 하자며, 떠들썩하게 마을을 이루도록 마셔댔다.  


  깨고 나니 부끄러웠다. 며칠 내내 겪은 고독의 한 자락을, 마음의 면면들을 내놓고 나니 내 이야기가 부끄러워졌기 때문이다. 퉁퉁부은 얼굴로 아침 일찍 그곳을 부리나케 빠져나왔다.

  하루를 더 여행으로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것이 짐을 푸는 일. 소개팅을 하는 일이었다. 너무나도 잘난 남자가 나온터라 적잖이 기분이 상해, 저녁 겸 커피까지 해결하고 집으로 가려는데, 이틀 전 여행지 무리에서 만난 동지들이 겸사겸사 함께 여행을 하게 되었고 나의 고향으로 들렸다고 나오란다. 하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으니 뿌리칠 이유가 없었다. 마치 나를 살려내려고 온 사람들 같았다.


  그곳에서 우린 또다시 끈적한 축제를 한바탕 벌였다. 온갖 지방어가 난무하고, 각양각색의 직업이 난무하고, 다양한 생각 다양한 나이가 번잡한 곳. 많은 군중들 속에서 우리는 우리들의 동지애로, 살가움으로, 새로움으로, 열정을 나누었다.


찰칵


  그는 사진찍는 것을 좋아했다. 우리들의 모습이 내내 신기한 듯 호기롭게 사진을 찍어나갔다. 심리학을 전공해서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단비같은 사람이었다. 여행을 좋아해서 이 여행이 끝나면  다시 머나먼 낯선 곳으로 떠날 것 같다고 말했던 사람이었다.


  나는 일상으로 돌아와 공부를 시작했고, 그는 미지하고 신비한 곳으로 떠났다.


  간간히 주고 받는 안부인사. 시간은 또다시 메어졌고,  그는 어느 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서울로 돌아와 일상에 적응해갔었다.


  우리가 다시 연락하기 시작한 것은 내 글때문이었다. 일상에 은몰되어있을 때 쓰기 시작한 내 글이 그는 그렇게도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참 다정한 사람이었다. 난데없이 나타나, 내가 좋아하는 커피를 주려고, 커피원두와 커피주전자와 커피가는 기계를 바리바리 싸와서 '이건 이렇게 하는거야. 내가 없을 땐 이렇게 마셔' 하고 속삭이던 사람.


  "시간은 참 부지런해. 누가 나에게 '시간은 참 부지런하다'고 그래서 우리도 그렇게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너무 웃기지 않아? 어떻게 저렇게 야무진 생각을 다할까?"


그는 얌전히 웃음을 띨 뿐이었다.


  "떠나고 싶어. 여행은 시간은 사는 일이라는데, 돈을 주고 벌어오는 일이라는데,
그래서 치열하게 무엇을 붙들어도 보고, 그 나라의 습기도 빨아대고, 가끔 목에 무언가 차오르기도하고, 쓸쓸한 장면도 마주하며, 울렁증에 사로잡히고 싶어."


그는 끄덕끄덕


  "슬픈건 난 현실에 매여있다는 거야. "


그래서 나는 그에게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니 그가 대답했다.


  "그럼 내가 너에게 나중에 시간을 선물해도 될까", 라고


  시간을 선물하겠다니, 너무 로맨틱했다. 한참을 넋놓고 생각했다. 그런 선물은 얼마나 서로를 돈독하게 해줄까,
  우리는 얼마나 치열하게 서로를 붙들게 될까, 서로의 습기도 빨아대고, 마음의 골짜기가 차오르기도 하고, 쓸쓸한 장면도 마주하며, 종종 울렁증도 사로잡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다.


  나는 그의 벅찬 제안을 잘게 씹어먹고 끝내 그에게서 뒷걸음질쳐 나갔다.


  결국, 나는 여전히 떠나지 못했고, 여전히 현실에 매여 살고 있지만, 나름대로 현실적인 답을 내렸다.

'시간아 너는 부지런히 살아. 나는 나대로 열심히 세상 즐기며 살려구, 그리고 내가 가장 눈부신 날에 홀로 떠날거야.'


 그는 어디쯤에서 어떤 공간에서 끄덕끄덕 짙푸른 웃음을 띠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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