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마녀의 테마에세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살면서 부닥칠 수 있는 딜레마의 다양한 가능성의 변수들을 짚어보는 작업이다. 간단히 말해 ”타인의 오감으로 체득한 타인의 삶을 통해 <나의 삶을 읽어내는> 것“이다.
비루하고 팍팍한 현실의 삶에 치여서 소설을 읽고 싶어도 읽지 못하네요, 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이해한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저는 현실적인 사람이라 실용서 자기계발서 이런 것만 읽습니다 소설 따위 안 읽어요” 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그냥 경멸을 보낸다. 현실적이고 싶은 건 희망사항이고, “현실적인 사람”이라는 모호한 정체성에 대한 환상에 기인한 착각에 빠져 있는 사람일 뿐.
실제로 내가 만나 본 사람들을 떠올려보면 책을 읽는 사람과 안 읽는 사람 간의 사고의 유연성의 차이를 비교할래야 할 수가 없다.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는 이 차이는 살면서 난관에 부닥쳤을 때 그 사람이 그걸 어떻게 돌파해내는지를 목격하며 느끼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나 사고가 경직된 사람들이 다 무너지는 건 아니다. 그냥 책 싫어요 혹은 잘 못 읽겠어요 라는 사람들을 어떻게 비난할 건가. 다만, 나는 그들을 비웃고픈 마음이 없는데 되려 그들이 나를 비웃어올 때가 어이없을 뿐이다.
-책 쓰면 돈 많이 벌어?
나는 아직도, 그 같쟎다는 투로 던져오던 그 질문의 메아리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살다 보면 떠올렸을 때 입술이 꽉 깨물리는 몇몇 순간들이 만들어져 머릿속에 각인된다.
권력의 핵심을 틀어쥔 자는 “쓰는 자”가 아닌 “읽는 자”이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자신이 읽지 못하거나 혹은 읽지 않는다는 이유로 “읽기”라는 작업을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나는, 글을 쓰는 “작가”이지만, 그 전에 글을 읽는 “해석자”이다.
내 프라이드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수면 위로 보이는 눈곱만한 재능은, 수면 아래 숨은 “노력”이라는 빙산의 지극히 일부일 뿐이다. 10을 얻기 위해 100을 폐기처분해야 했던 쓰라림에 대해 나는 누구에게도 내 심정을 낱낱이 고백한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