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없이 마주한 주황색 지붕은 여전한 감동이었다.
10월 30일
숙취가 가득한 아침을 맞이했다.
어젯밤 만난 사람들과 어찌나 죽이 잘 맞던지, 가장 늦게까지 여는 두브로브니크의 펍에서 새벽 3시까지 이야기하고 놀댜가, 아쉬운 마음에 펍에서 와인 두 병을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와인과 가져온 소주, 복분자주를 풀어내어 새벽 5시까지 술자리를 이어나갔다. 얼마나 즐거웠으면 졸린 줄도 모르고 그렇게 웃었을까.
아침 10시까지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다들 점심 때가 되어서야 일어났다. 피곤할 만도 했지. 여행지에 와서 이렇게 늦게까지 논 것도 오랜만이었다.
점심 때가 되어서야 밖으로 나간 우리는 스르지산을 오르기로 했다. 나도 마지막날 스르지산에 오르려고 했는데, 어떻게 일정이 다 맞아떨어졌다. 이것도 인연인가.
우리는 (숙취로 인해...) 올라갈 때는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올 때는 좀 걸어보기로 했다. 이 좋은 가을바람과 여름햇살이 쏟아지는 날, 두브로브니크에서 바다를 보고 걷지 않는다면 그건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전망대에 올라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를 내려다보는데, 우리가 생각한 풍경이 아니었다. 우리가 타고 온 케이블카의 선이 풍경을 방해하고 있었다. 실망가득히 난간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그만 내려가자고 얘기를 했다. 다들 같은 마음이었는지 얼른 내려가서 밥을 먹자고 한다. 그렇게 우리는 터덜터덜 산길을 걷고 또 걸었다.
그런데 산길을 빠져나오자 말도 안돼는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우리가 사진으로만 보았던 그 두브로브니크가 눈 앞에 있었다.
여기가 보석이었다며, 전망대가 아니라 여기서 봐야하는 거라며 다들 소리를 질렀다. 걸어내려오지 않고 또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갔더라면 이 풍경은 절대 볼 수 없었을 거라고. 우리의 선택이 또 한 번 우리를 웃게 했다. 날이 맑아서 그런지 바닷속이 보인다.
거의 다 내려왔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뭔가 이상함을 직감했다. 내려가는 사람은 우리 밖에 없고 차만 다녔다. 하하핳.. 길은 끝나가는데 올드타운은 아직도 저 밑에 있었다. '어떻게 하나' 고민을 하고 있는데 승용차를 탄 할아버지가 우리보고 타라고 한다.
"와, 우리 데려다 주는 거야?"
엄청 신나서 들떠있었다. 너무 고마워서 우리가 몇번을 고맙다 하고 내리려는데... 아저씨 표정이 이상하다.
"음, 나는 니네가 돈을 내야한다고 생각해"
그래 어쩐지 순순히 태워줄리가 없지. 그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까. 그래도 너무 했다 아저씨.. 탈 때 말이라도 해주지. 그렇게 우리는 궁시렁궁시렁 하면서 올드타운 안으로 들어왔고 항구에 있는 레스토랑에 가서 밥을 먹었다. 아침도 제대로 못먹고 몇시간을 걸었나. 끝이 없는 산길을 걸어내려왔으니 배가 고파서 흡입을 했다.
점심을 먹고, 일행 중 언니 한 명이 떠나야하는 시간이 왔다. 어쩜 떠나는 순간도 다들 비슷한지.. 먼저 가야하는 언니의 얼굴엔 아쉬움이 가득했고, 우리는 아쉬움 가득 담아 언니를 버스에 태워보냈다.
생애 첫 유럽여행인 언니, 혼자 잘 할 수 있겠지? 언니가 행복한 여행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첫 유럽여행때는 좋았는데, 정말 좋은데... 엄청나게 재밌고 즐겁고 그러진 않았던 것 같다. 그 땐 즐기는 게 뭔지도 잘 몰랐으니까. 나에게 맞는 여행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남들이 다 가는 곳, 가이드북에 의존해서 다녀서 그랬던 것 같다.
언니를 보내고 올드타운 옆에 있는 '로브리예나츠 요새'에 올랐다. 아. 이름이 정말 너무 어렵다.
로.브.리.예.나.츠
근데 날씨가 이상하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해가 쨍쨍하고도 남아 타버릴 것만 같은 그런 날씨였는데 한순간에 먹구름이 드리우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필름카메라는 참 날씨가 흐린 이런 날에도 열일을 한다. 내가 보았던 그 느낌을 생생하게 잡아냈다. 푸른빛이 돌던 바다가 집어삼킬 듯한 무서운 검은 빛이 돌았고, 구름은 엄청난 먹구름이 몰려왔지만, 두브로브니크의 지붕만큼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와중에도 운치는 참 좋다. 비가 그쳐갈 때 쯤 바다쪽으로 슬슬 마실을 나가는 오빠들. 비가 온 덕분이었는지 요새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아치형 문안에서 우리는 비를 피하고 앉아있었다. 언제쯤 그치려나. 비가오니 한식생각이나서, 숙소로 돌아가면 한식을 해먹기로 했다.
호스텔로 돌아와서도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았고, 우리는 우산을 쓰고 장을 보러갔다. 오랜만에 내리는 가을비에 모두들 몸을 숨겼나보다. 활기차고 사람이 넘치던 스트라둔대로는 조용하고 차분했다.
호스텔에 일찍 들어와서 그런지 사람도 없었고 조용했다. 얼른 요리를 해야겠다는 마음에 급하게 로비에서 부엌으로 들어오다가 짐을 넘어뜨렸다. 캐리어가 넘어가면서 한 외국인 남자의 발에 닿아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더니 "괜찮아요."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잘못들었나' 해서 한 번 쳐다보고 부엌으로 들어갔는데 잠시후에 부엌으로 그 남자가 들어왔다.
그러더니 우리보고 "한국음식 만들어요?" 라고 하는게 아닌가..? (난 한국말하는 외국인을 엄청 좋아한다.) 이런 곳에서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외국인이 있어서 되게 신이 났다. 그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지는 못하지만 기본적인 언어는 다 할 줄 아는 호주 남자였다. 리차드는 부산에서 3개월을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기본적인 한국말을 할 줄 았았나보다. 리차드가 비빔밥에 관심을 보여서 같이 밥을 먹자고 말을 했다.
엄청 잘 먹는 리차드의 모습에 엄마미소가 지어지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또 우리는 한식의 세계화를 외치며, 몇 분 전에는 알지도 못했던 누군가와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차려진 우리의 저녁은 그릇터져 나갈 것 같은 비빔밥과 소세지 야채볶음, 그리고 빠질 수 없는 맥주였다. 비빔밥은 정말 채소볶은 거 넣고, 고기넣고, 계란도 넣고, 고추장도 넣고...! 진짜 엄청 맛있었다. 외국에서 먹는 한식은 어쩜 이렇게 다 맛있는지... 여행하면서 입맛에 잘 안 맞아서 살이 빠진다고 하는데, 나는 점점 찌고 있었다...
리차드랑 얘기를 하다 보니.. 하루 더 있고 싶었다. 소피아를 가기 위해서는 이 날 아니면 버스가 며칠 뒤에나 있어 떠나야 한다는게 아쉬울 뿐이었다. 리차드랑 더 얘기도 하고 싶고 언니, 오빠들이랑 헤어지기도 싫었지만...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또 헤어짐은 다시 만날 수 있는 시작이라 생각했다. 여행에서 만난 모든 인연들은 그렇게 헤어짐이 있는게 당연했다.
첫 유럽여행때는 그 사실이 나를 지치게 했었다. 헤어짐이 힘들어서 사람을 만나는 것 조차 버거워졌었다. 오랜시간 여행을 해서 그랬던 것인지, 내 마음이 많이 지쳐있어서 그랬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번 여행은 조금 달랐다. 이번엔 아쉬워도 그 모든게 즐거웠고 행복했다. 그래.. 그랬다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하루를 보내고, 나는 소피아로 가기 위해 경유지인 마케도니아로 가는 야간버스에 몸을 실었다.
언젠가, 언젠가는 다시 오게 되겠지? 이게 마지막은 아닐 거야. 다시 올거야 꼭.
[당신의 순간을 담습니다]
필름카메라를 들고 세상을 여행한 이야기.
유럽의 여름, 가을, 겨울을 필름으로 담아낸 사진집이 책으로 나왔습니다.
"필름으로 세상을 담는 것이 즐거웠고, 사람을 만나는 것이 행복했다.
풍경보다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을 담고 싶었다. 필름은 찍는 사람의 감정에 따라 너무나 달라지는 사진이기에, 여행에서 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이 겪었던 순간의 감정들을 온전히 담아내려고 했다. 어린 시절 아빠가 찍어주었던 사진처럼, 그리움의 감성이 묻어나는 사진들이 힘든 시간을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길 바란다."
* 알지 못했던 유럽의 매력, 볼 수 없었던 영화같은 순간들, 책에서는 더 많은 필름사진을 보실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랑 부탁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