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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칠마루 Jan 24. 2024

물과 기름 같았던  입사 20주년 동기 모임

2023년 1월 어느 날

작년 12월 어느 날이었다. 큰 아이를 영어학원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던 길에 전화벨이 울렸다. 업무 특성상 언제, 어디서든 전화 연락이 유지되어야 했기에 전화와 카톡은 바로 확인하는 편이었다. 신호 대기 중 본 메시지는 평소에는 조용하던 동기모임 카톡방이었다. 원래 2~3달에 1번 동기들 근황을 묻는 정도였는데 웬일로 연락이 올까 싶었다. 아마 누군가의 장례식을 알리는 것이리라 지레 짐작했다. 나를 포함한 동기들 모두 나이가 최소 40대 중반(다들 기혼에, 아이가 있어 개인 시간을 내기가 힘듦)이어서 이젠 누군가의 장례식 외에는 얼굴 보기가  힘들어졌다. 그리 여기고 메시지를 확인한 나는 슬쩍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얘들아, 오늘이 우리 입사 20년 되는 날이야.” 우와, 내가 C0 회사에 입사했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년이라니, 시간이 빠르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 20년 동안 결혼에 이어 두 아들이 태어났고 입사한 회사를 떠나 전혀 연관이 없던 소방관을 하게 되었다. 입사 20년을 기념해 동기모임을 제안하고 싶었으나 혹시나 다른 동기들이 바쁠까 봐 일부러 말을 아낀 채 누군가의 모임 제안을 기다렸다. 아직 다리가 다 낫진 않았다. 걷는 건 괜찮지만 계단은 여전히 힘들었다. 모임 장소까지는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해서 지하철과 버스의 계단을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다. 그래도 간만의 동기모임은 꼭 참석하고 싶었다. 3시간쯤 지났을까? 맏형인 00형이 시동을 걸었다.     


00 형 : 얘들아, 우리 얼굴 함 봐야지

동기 1 : 그래, 우리 언제 볼까?

동기 2 : 난 좋음

동기 3 : 우리 그때가 재미있었는데...     


모임 제안과 더불어 모임 일정을 묻는 투표가 이어졌다. 그리고 2003년 연말 한창 유행한 싸이월드에 있었던 우리 동기들의 여러 모습과 두 달간의 신입사원 연수 중 지도 선배 몰래 동기들 12명이 청량리에서 강촌으로 1박 2일 여행을 갔던 일, 신입사원 연수의 꽃인 제품설명회 기념사진 등이 동기들의 보물창고에서 흘러나왔다. 동기 중 95학번 형이 당시의 사진자료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완벽하게 보관 중이어서 각종 흑역사의 사진들이 20년 만에 다시 세상에 나왔고 그 사진을 본 우리들은 서로 웃느라 바빴다.      


같은 조였던 12명의 동기들 중 현재 C0회사에 남아있는 인원은 2명이었다. 겨우 2명이라니 16%만 살아남았다. 동기 중에 제일 나이가 많았던 00형은 교통사고로 10년 전 먼저 하늘나라로 떠났다. 나머지 11명 중 나만 공무원이고 10명은 모두 같은 업계에 종사 중이었다. 벤처회사 CFO 1명, 암 진단회사 CEO 1명, 00 제약 영업부장 1명, 연구소장 3명, 항공사 1명, 골프용품 회사 1명, 약국 운영 1명, 나머지 2명은 회사를 떠난 뒤 연락이 두절된 사람들이었다.      


동기모임을 하는 1월 중순 어느 날, 영하 7~8도의 날씨였다. 마포역 인근의 고깃집에서 1차를 시작했다. 6시 30분 정각에 도착하니 모임을 제안한 00형이 이미 도착해서 나머지 동기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형이 결혼할 때 본 2008년이 마지막이니까 약 15년 만에 보는 건데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았다. 서로 잘 지냈냐며 안부를 확인하고 자리에 앉았다. 10분, 20분이 지나며 차츰 빈자리가 채워졌다. 원래 참석의사를 밝혔던 동기 중 2명은 끝내 오지 못했다. 골프용품 회사에 다니는 동기는 갑작스러운 1주일간의 출장으로 불참, 항공사에 다니는 동기는 모임 전날 가슴이 아파 병원에 갔더니 폐색전증 진단을 받아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자리에 모인 동기는 나를 포함해 총 6명이었다.      


그런데 조금 시간이 흐르니 만나서 반갑기만 했던 내 마음이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왜 그리 느끼게 됐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20년 동안 나도 변했지만 동기들 역시 변했던 게 이유였다. 1차 고깃집과 2차 호프집을 거친 4시간 동안 여러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주로 다른 동기들이었고 나는 주로 듣는 쪽이었다. 얘기를 듣는 동안 몇 가지가 계속 내 마음에 생각할 거리를 남겨 혼자 왜 이럴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들 몇 다리만 건너면 아는 업계 사람들이기에 간혹 일 얘기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참 특이한 것이 영어를 섞어 쓰는 버릇이었다. 맞아, 예전 신입사원 연수 때부터 느꼈던 점이었다. 우리말로 할 수 있는 걸 굳이 영어를 섞어 쓰냐는 질문에 지도선배는 우리말을 사랑하는 후배가 들어왔다며 별다른 답을 말해주지 않았었다. 나만 그런 어투가 거슬렸는지 다른 동기들은 영어를 섞어 쓰는 것에 별다른 거부감이 없는 듯 보였다. 그걸 부자연스럽다고 느낀 사람 역시 거의 없어서 나 역시 슬며시 꼬리를 내리고 마지못해 영어 섞어 쓰기에 순응했던 기억이 났다. 동기들은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지내다 보니 영어를 섞어 쓰는 게 습관으로 굳어진 듯싶었다. 예를 들면 문맥상 “누가 너한테 대들었어?”란 말을 “누가 너한테 challenge 했어?”라고 쓰거나 확인 대신 confirm이란 말을 쓰는 등 우리말과 영어 단어를 아주 자연스레 바꿔 쓰고 있었다. 친한 동기들이라 일부러 그런 버릇을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오랜만에 느껴보는 새로운 문화충격이었다. 그리 듣기 좋은 말버릇은 아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점은 나와는 다른 그들의 사회적 지위였다. 명함을 주고받으며 확인한 동기들은 직함도 꽤나 그럴듯했다. CEO와 CFO, 연구소장, 가장 낮은 애가 영업부장이었다. 그런 직함과 더불어 구체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1억 넘는 연봉을 받는 그들과 달리 명함도 없고 연봉도 낮은 나는 동기들과 비교 자체가 되지 않았다. 돈 잘 벌고 그럴듯한 직함의 동기들이 서로 계산하겠다고 해서 돈 한 푼 쓰지 않았지만 왠지 씁쓸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소방관이 된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다만 같이 사회생활을 시작한 동기들에 비해 내세울만한 직함도 없고 연봉도 낮아 그저 조용히 그들의 얘기를 듣고 있던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모임 시간 내내 대답만 하거나 추임새를 넣어주는 게 전부였다.      


반가운 마음과 입사 2년 동안의 예전 추억만으로는 20년이 지난 지금 동기들과 어울리는 데 꽤나 큰 한계가 있었다. 그렇지만 서로의 앞날을 축복하는 마음은 여전했다. 예전 같은 회사를 다닐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시간이 흐르고 맡은 직무에 따라 이렇게나 입장이 달라질 줄이야, 저녁 22시 30분, 대중교통이 끊기기 전에 출발해 집으로 들어오는 2시간 동안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고 여러 가지 생각으로 마음이 어지러웠던 동기 모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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