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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칠마루 Feb 14. 2024

2(나쁜 일)+1(좋은 일)=0

유리컵 깨짐, 청소기 고장, 다친 이 없음

24시간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상하게도 집에만 오면 근무 내내 멀쩡했던 몸이  急(급할 급) 피곤해짐을 느낀다. 회사 있을 때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왜 그러는 걸까?


일 마치고 집에 들어오는 순간 눈꺼풀이 반쯤 감기다 보니 웬만하면 편히 누워 자고 싶다. 아내도 출근하고 애들도 학교를 가는 3월이면 집에 온 후 내 루틴(집 정리, 청소, 세탁기 작동)대로 하고 마음 편히 눕겠지만 명절 연휴였던 월요일 내 루틴대 하지 못하고 그냥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들어서자 내 기대와는 다른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아이들이 아침 식사 후 엄마가 시킨 숙제(영어, 수학)를 하고 있는 것은 평소와 같았다. 다만 주방 선반과 싱크대 쪽은 전쟁이라도 난 듯 엉망진창이었다. 올라오는 짜증을 누르며 아내에게 물었다(정리되지 않고 어질러진 걸 싫어합니다, 그에 비해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나 : 무슨 일 있었어?


아내 : 봄맞이 그릇 설거지하다가 유리컵이 깨졌어, 식탁 의자를 딛고 올라섰는데 그게 기우뚱하면서 넘어질 뻔했지 뭐야, 그런데 다행히 컵만 깨졌어, 어제 저녁부터 시작했는데 아직도 정리가 안 끝났네, 자기는 얼른 들어가 자(아내는 한참 주방을 치우다 나를 흘깃 보고는 그새 짜증 난 걸 짐작한 듯 보였다)


나 : (어질러진 집 상태를 보며 짜증이 났으나 참았음, 맘속으로는 그러게 왜 봄맞이 설거지를 해서 이 난리냐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그럴 경우 싸울 게 뻔해 입을 꾹 닫았다) 다친 곳은 없어?


아내 : 응, 그냥 컵만 깨졌어, 자칫 잘못했으면 넘어지면서 얼굴을 주방 상판에 부딪히거나 컵이 얼굴로 떨어졌을 수도 있는데 아무 데도 다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이야? 컵 깨진 주변을 내가 3번이나 물티슈로 닦고 바닥도 청소기로 3번이나 밀었어. 지금 어질러진 거 보기 불편하지? 안방 들어가서 자고 나와, 그러면 다 끝나있을 거야.


나 : 응, 잠깐만


아내가 그리 말하니 화낼 명분이 아예 없었다. 다만 컵이 떨어진 곳 주변에 아직도 유리조각이 있는 것 같아 물티슈로 주방 상판을 닦았다. 아내가 닦았다지만 깨진 유리조각은 계속해서 내 눈에 보였고 바닥에서도 유리조각이 밟혔다. 아내가 청소했다지만 아무래도 바닥 청소를 한 번 더 해야 할 정도로 바닥에 부스러기가 많았다. 안 되겠다. 청소기를 들고 바닥을 밀었다. 어라, 원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부드럽게 바닥을 밀고 나가야 하는데 뭔가 걸리는 느낌이 났다. 이거 뭐지, 고장 났나? 역시나 나쁜 예상은 어긋남이 없었다. 청소기를 본체, 1미터 남짓한 연결봉, 헤드로 분리했다. 어느 쪽이 고장 났을까? 부위별로 자세히 살펴보니 청소기 헤드의 길고 동그란 브러시가 움직이지 않아 먼지 흡입도 잘 되지 않고 움직임도 둔해진 것이었다. 그로 인해 아내가 청소를 3번이나 했지만 바닥에는 여전히 먼지가 많았던 것이었다. 고장 난 청소기를 고칠 수는 없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뭐라도 해봐야지. 아쉽게도 맥가이버(80년대 후반 MBC에서 방영한 미국드라마, 주인공이 주변 사물을 활용해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냄)가 아니어서 설명서를 읽고 헤드를 분리한 후 청소해 보는 게 전부였다.


움직이지 않는 청소기 헤드 브러시


고장 난 청소기는 LG 오브제 무선 청소기로 3년째 쓰고 있는 제품이었다. 다만 전에 썼던 유선 청소기에 비해 먼지를 흡입하는 힘이 약했고 그 약함을 청소기 헤드의 브러시가 먼지를 쓸어 담으며 보완하는 듯했다. 그런 기능을 담당하는 곳이 고장 났으니 제대로 소가 될 리 없었다. 브러시가 멈춘 상태로는 제대로 유리조각을 빨아들이지도 못했을 터였다.


헤드를 분리하고 가는 털로 뒤덮인 브러시를 떼어냈다. 헤드 덮개 안쪽에 먼지가 잔뜩 끼어 있어 혹시 이것 때문에 브러시가 움직이지 않나 싶어 먼지를 깨끗이 닦았다. 아내 말로는 청소기 충전도 하고 먼지통도 다 비웠다고 했으니 헤드 청소를 마친 후에 먼지 흡입이 안되면 휴일이 끝나는 내일 AS센터로 가야 했다. 5분 동안 헤드 청소를 했건만 내 노력과는 달리 헤드 브러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헤드 왼쪽 바깥에 바람구멍에 모터로 추정되는 부품이 보였는데 아무래도 그쪽 부품에 이상이 있지 않나 짐작할 뿐이었다.


바닥 청소는 이미 내 손을 떠났고 남은 건 아내의 정리뿐이었다. 아내는 분기별로 한 번씩 대청소를 하는데 하필 오늘이 그날이었나 보다, 거기에 유리컵이 깨지고 청소기마저 맛이 가는 상황이 겹쳤을 뿐이었다. 난 정리되지 않은 집도, 어쩌다 한 번씩 발견되는 유리 조각도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청소기로 바닥 한 번 밀면 속이 다 후련할 텐데, 그건 내 생각일 뿐, 아내와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이 상황이 불편한 건 나 혼자뿐이었다. 


어쩌랴,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야지, 화요일 아침이 되면 일어나자마자 청소기 AS를 받고 세차(지난 9월에 세차했으니 무려 5개월 만이다, 차가 먼지로 코팅되어 있었다)를 한 후 이비인후과에 들러 비염 진료를 받아야 하는 일이 남았다... 집에 있으면 해야 하는 일의 연속이다. 그래도 어제는 현명한 아내의 대처 덕에 화내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절제할 수 있어야 하는데 가족들에게 쉽게 짜증을 내는 내가 실망스러울 때가 있다. 날마다 조금씩 더 내 마음이 더 커지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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