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듬 Dec 20. 2018

모르는 척

교실 속 이야기

6교시 담임 반 수업. 교탁에 책상을 맞대고 앉은 맨 앞자리 아이가 교과서도 잘 올려 두고 프린트물도 잘 꺼내 두었지만, 수업하러 들어온 나를 보고 알은체도 않는다. 볼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고 눈은 새빨간 게 꼭 울었던 얼굴 같기도 하다.


"얘들아, 오늘은 어휘의 유형을 공부할 차례야.

그런데 우리 ㅅ은 왜 고개도 안 들고 있을까?"


이 고개를 아주 잠깐 들었다가 숙이고서는 묵묵부답이다. 주변에서는 웅성웅성. "선생님, ㅅ 아까 풋살하다 저한테 졌어요. 그래서 그럴걸요." 등등. ㅅ의 모습을 보며 참견해대는 이들이 몇몇 생긴다. 평소 ㅅ이라면 친구들이 우스갯소리로 놀리니 곧 발끈할 만도 할텐데, 통 반응이 없는 게 평소와 다르다.


"쉿! 그만. 얘들아, 수업하자."


하고는 교탁에 바짝 붙어, 수업 진도에 맞춰 교과서를 넘기며 ㅅ에게 슬쩍 말을 조그맣게 흘린다.


"ㅅ아. 무슨 일 있었나 보구나. 알았어."


선생님이 자신을 계속 보고 있고, 신경 쓰고 있는 것을 알텐데도 한 시간 내내 ㅅ은 고개를 숙인 채로 졸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로 있었다. 나는 교탁의 바로 앞 자리, 한가운데서 고개를 숙이고 마냥 버티고 있는 ㅅ이 눈에 계속 걸렸지만 모르는 체하고 수업을 계속 했고, 나의 무관심에 아이들도 어느새 ㅅ에게 보이던 관심을 접어 두고 제 할 일들을 했다.


종례를 마치고, 휴대폰을 챙겨 가느라 북새통을 이루는 교탁. 그 앞에서 휴대폰을 챙기려고 서성이는 ㅅ에게 속삭였다.

"무슨 일 있으면, 도움이 필요하면 꼭 쌤한테 말해 줘. 메시지 보내도 되고."


"예."하고 대답은 했지만 평소 자기 표현을 잘 안 하는 녀석인데다가 불쾌한 일을 겪었던 것 같아 내게 별 얘기 안하겠지 싶었는데, 웬일로 늦은 저녁에 메시지가 왔다.


아까 점심 시간에 *반 애들이랑 풋살장에서 풋살하고 있었는데요.. 김OO이 절 밀었는데 제가 몇 번은 참았는데요. 1대1 상황에서 제가 드리블하는데 밀어서 제가 넘어지고 걔도 넘어졌어요. 축구하다가 발에 걸려 넘어질 수 있는데, 실수로 했는데, 걔가 먼저 밀치고 저도 밀쳤어요. 걔가 주먹을 한번 휘둘렀는데 제 머리를 살짝 스쳤어요. 그리고 제가 걔 멱살을 잡았는데 걔 패딩조끼가 찢어졌는데 애들이 말려서 끝났어요.
솔직히 걔가 저 1학년 때부터 피부색 가지고 놀리고 그런데도 참았어요. 솔직히 이건 아니다 싶어서 못 참았어요. 이런 일이에요.


구구절절 속상한 이야기뿐이었다. 다툰 친구와 같은 반이었던 작년에 놀림 당했던 것도 말 못하고 넘어간 경험이 있었는데, 오랜만에 함께 운동을 하다 충돌이 발생했으니 속상할 수밖에. 누구에게라도 울분을 토하고 싶었을 것 같았다. 놀림 당했던 지난 일을 들춰 속상하다 얘기하는 건 요 또래 남학생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 중의 하나라 친구들에게도 솔직히 설명하지 못했을 것도 같았다. 그러니 친구들도 변죽만 두드리거나, 놀리기나 했을테고. 결국 씩씩거리며 분을 삭이느라 수업을 한 시간 통째로 놓친 것이었다.
그래도 ㅅ은 이렇게라도 오늘 일을 꼭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싶다. 상대를 불러다 혼내달라는 것도 아니고 상황을 해결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도와달라는 것도 아니라며 그냥 말하는 거란다. 그러고보니 ㅅ은 누구라도 자기가 분했던 이유를 들어주기를 바랐겠지 싶다. 해결하기 힘들면, 도움이 필요하면 꼭 다시 말해달라고 부탁(?)하고 대화를 마쳤다.


내가 조심스레 묻지 않았더라면, 내가 대꾸가 없는 ㅅ에게 왜 나를 무시하느냐고 화를 냈더라면 이렇게 자기 생각을 들려주었을까 싶어져서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만약 ㅅ을 혼냈다면, 우리는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가 아니라 척을 지고 서로의 생각을 숨기는 사이가 되어버렸으리라 생각하니 6교시에 섣불리 입을 열지 않은 내 스스로에게 고마워진다.
학교에서는 이렇게 사소한 일 하나하나가 마음을 흔든다. 사실 남학생 서른 명을 데리고 수업을 하기란 마냥 쉽지 않아서 눈에 띄는 학생은 이유불문 태도를 먼저 지적하고 혼내기 십상이고, 나 역시도 최근 그런 태도가 서서히 몸에 배는 것 같다고 생각하던 차에 다시 마음을 다잡아 봐야겠단 생각이 드는 오늘이다.

'때로는 모르는 척도 필요하다. 다른 이유가 있을지 모르니 잠시만 기다리는 여유도 필요하다.'라고 되뇌며 아이들을 만나야 할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초대 받지 않은 손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