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경, 우리가 처음 마주한 프리맨틀은 청명함 그 자체였다.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하고 푸른 하늘을 얼마 만에 보나 싶었다.
프리맨틀은 꽤 작은 동네였다. 걸어서 요기조기 마을 곳곳을 다 쏘다닐 수 있을 듯했다. 하늘 높이 치솟은 건물이나 주변을 압도할 만한 건물도 없고 엇비슷한 키의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인 게 소박하면서도, '동네 너무 예쁘다' 소리가 절로 나는 곳이었다.
내일 배를 탈 B Shed도 쓱 지나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몇 분 걸었을까 곧 숙소에 도착했다. 우리, 정말 유니버설 스튜디오 같은 데 들어온 것 같아.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이 도시. 커다란 나무들과 나지막한 건물이 자연스레 어깨를 맞댄 모습이 아름다웠다. 우리의 서호주 첫 숙소, 에스플라나드 호텔 역시 멋져 보였다.
어제 오후 세 시 좀 넘어 나와, 오늘 호주 시간으로 오후 4시가 다 되어 숙소에 들어왔으니 장장 24시간을 넘게 밖에 있었다. 인천공항에서 샤워를 하고 출발해서 그나마 몰골은 생각보다 나은 상태였지만, 긴 비행시간에 진이 다 빠진 우리. 둘 중 누구도 얼른 나가자고 재촉하지 않고 자연스레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한동안 멍하니 누워 있다가 샤워를 간단히 하고 밖으로 겨우 나섰다. 우리에게 먹을 게 있었다면 나서지 않았을지도 모를 정도의 컨디션이었지만 힘을 내 보았다.
에스플라나드 공원을 가로질러 식당으로 가는 길. 해가 좀 기울었는지 나무 그림자들도 가로로 길게 누웠다. 건물만큼 높은 나무들이 만든 그림자들은 그마저도 크고 길었다. 분명 봄인데, 나무 그림자 안으로 발을 들이면 금세 가을 속에 선 듯 서늘했다.
항구에 접한 아름다운 식당 '씨첼로'를 찾았다. 외부에도 테이블이 많이 놓여 있었지만, 식사 중인 테이블 주변으로 갈매기가 잔뜩 모여 곧 잔치를 벌이려고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음식을 두고 갈매기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싶지 않은 우리는 얌전히 식당 내부에 자리했다.
노을이 조금씩 물드는 풍경을 보며 저녁 식사를 했다. 해산물 차우더는 짭조름하고 씹는 맛이 좋아 빵을 곁들여 먹으니 아주 만족스러웠다. 따끈하니 좋았던 것도 사실. 코스트코의 클램차우더 상위 ×3 버전 같이 느껴졌다. 영국에서도 흔하지만 호주에서도 흔히 먹는다는 피시앤칩스도 함께 시켰다. 우리의 기대가 너무 낮았던 것일까, 피시앤칩스는 생각보다 먹을 만했다. 우리로 치면 명절에나 보는 대구전을 좀 더 기름지게 튀겨낸 느낌이랄까. 곁들여 먹은 오징어 튀김은 말해 무엇하랴, 만점.
기세 좋게 식사를 시작했지만, 음식은 골고루 맛있었지만 조금씩 포크질이 느려지는 순간들이 생기던 우리. (김치를 달라!) 그럴 때면 코울슬로를 잔뜩 집어 먹고 제로 펩시 한 모금으로 느끼함을 누르고 다시 속도를 높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감자튀김은 한 접시 그대로 남았다. 먹고 또 먹은 후에도 접시 위에 수북이 남은 칩스를 보며 호주 사람들이 우리 강원도 사람들보다 더 먹네,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 우리는 첫 끼니에서부터 호주인들에게 감자튀김은 주식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고, 앞으로의 여행 중에는 점점 나름의 확신을 가지게 된다.
저녁을 먹으며 프리맨틀까지 다다르기까지 내가 퉁명스럽거나 불편하게 한 것이 있었느냐 남편에게 물었다. 괜찮았단다. 사실 지금까진 어디 쫓길 일도 없고, 혼자서 앞장서 서두를 일이 없었지. 내 스스로 조심하려고 신경 쓰기도 했는데 다행이었다. 이번만큼은 여행 동반자의 컨디션을 고려하는 세심한 동반자가 되어야지! 다시 속으로 다짐을 했다.
물과 간식 사러 마켓을 찾아가는 길. 식당 건물 뒤로 점점 짙어지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거세서 춥다면서도 수평선 위로 노랗게 마지막 빛을 발하는 태양의 아름다운 모습에 발이 한동안 묶여 있었다. 언덕이나 산이 없어서 그런지 오랜 시간 황혼이 이어진단 느낌이었다. 붉은 기운이 분홍빛과 보랏빛까지 만들어 낸 태양이 파란 바다에 잠식되어 가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이미 오후 다섯 시 안팎으로 불 꺼진 상점들이 그득한 거리. 펍 몇 군데를 빼고는 인적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내 마음가짐 탓이었을까 동네의 분위기였을까, 무섭기보단 동네가 참 한산하단 느낌이었다.
12월이 철이라는 망고가 산더미 쌓여있는 것을 보고는 참지 못하고 망고도 사고. 우리가 해외여행할 때 과도를 굳이 챙기는 이유가 다 있지. 더불어 이것저것 군것질 거리들을 좀 샀다.
프리맨틀에서 딱 일박밖에 하지 못한다는 게 좀 아쉬웠던 밤. 조금 더 밝을 때 조금 더 천천히 둘러보고 싶었는데 로트네스트 섬에 들어가는 일정에 좀 더 방점을 찍었던 탓에 시간 여유가 많이 나지 않았다. 한적하고 여유로웠던 프리맨틀에 다시 갈 일이 있기를 바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