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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맨틀까지 스물네 시간

춘천-인천-싱가포르-퍼스-프리맨틀

by 보듬 Jan 1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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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퍼스 여행에는, 공항까지 가기 위해 공항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5일부터 17일, 무려 십삼일이나 되는 여정이라 자차를 공항에 주차해 기에도 좀 부담이 되거니와, 돌아오는 비행기가 오전 도착이라 집까지 운전하기에도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이럴 때 공항버스는 아주 좋은 선택지가 되어 준다.

오후 4시 10분 공항버스를 타기 위해 터미널로 향했다. 택시 기사님께서 터미널 앞에 차를 세우곤 직접 짐까지 내려주시니 마음이 푼푼해졌다. 좋은 시작이구나.


그러나 공항까지 가는 길은 꽤나 막혀서 출발 후 두 시간이 되도록 남양주 사패산 터널 안에 묶여 있었다. 최근에 타이베이를 가느라 같은 시간 버스를 탔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버스 예약 시 확인되는 '예상 소요 시간 2시간 40분'은 이제 없다 생각하는 것이 차라리 마음 편하겠구나 싶어졌다.

사실 공항에 일찍 도착하겠다고 제법 부지런히 나선 것이긴 했다. 비행기 출발 시간은 23시 15분인데 마음이 바빴다. 우리는 오늘 공항에서 체크인 전에 샤워도 하고, 수속 후에는 면세품을 찾아서 게이트백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두 가지 일 모두 새로운 도전(?)이라 여유 시간을 확보하고 싶었다.

7시 20분경, 버스를 탄 지 무려 세 시간이 넘은 후에 드디어 공항에 도착했다. 저녁으로 쌀국수를 먹기로 했다. 남편이 화장실 간 사이 내가 식당의 위치를 찾아 먼저 이동했고, 남편에게 전화로 쌀국숫집에 오는 길을 알려 주었다.
허나 괜히 마음이 급한 나는 툴툴대며 차갑게 말하고야 말았고, 쌀국수를 후룩 먹으면서 남편에게 쌓여 있던 앙금이 터져 나온 걸 잠자코 들어야 했다.


남편이 말했다. 내가 해외만 나가면 차갑고 짜증스러운 구석이 있다고, 십여 년만에 새로운 모습을 본다고 느꼈다고. 부정할 수 없었다. 사실은 내 스스로 모르는 바가 아니어서 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치부를 지적당하니 민망하기도 하고. "내가 사람 많거나 시간에 쫓기거나 다음 일정이 있으면 조바심에 자꾸 그래." 정말 미안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이번 여행은 다정하게 굴어 보겠다고 다짐하며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의 첫 미션. 공항에서의 샤워. 지하에 있는 스파온에어 찜질방에 갔다. 입구에서 비용을 지불하며 남편과 8시 5분까지 씻고 나오기로 약속했다. 불과 십여 분만 씻어야 한다니 엄청 서둘러야 했다. 느릿느릿, 씻는 데 나보다 훨씬 오래 걸리는 사람이 이게 가능하다고? 의구심 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남편은 제법 결연해 보이기까지 해서 시간 약속을 믿고 각자 샤워장에 입장했다.

샤워 공간은 제법 괜찮았다. 개별 샤워실이 여러 개 있고, 공용 탕은 세 개 정도. 손님이 아무도 없어서 전세 낸 듯이 씻었다. 만 원이나 냈는데 십여 분만 쓴다니 아까웠지만 어쩔 수 없지. 탕에도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약속 시간 지키겠다고 부지런히 움직여서 8시 7분에 나왔다. 머리도 채 못 말리고 헐레벌떡 나오니 직원 분께서, "엄청 일찍 나오셨네요, 아직 안 나오셨는데." 하신다. 남편은 16분이 되어서야 나왔다. 믿은 내가 바보였지. 제 딴에는 분명 서두른 것일 테지만.

급하게 씻는다고 정신은 없었지만, 뜨끈한 물에 샤워를 하고 나오니 개운하고 몸도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탑승 전 샤워는 아주 좋은 선택이었던 걸로.



두 번째 미션. 면세점 인도장에서 캐리어를 인도받고, 탑승구에서 게이트백을 하는 경험도 했다. 처음이라 부담스러웠지만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었다. 인도장에서 물건을 잘 받고, 탑승구에서 항공사 직원 분께 건네주기만 하면 되었다. 우리는 직원이 탑승구 앞에 있는 저울에 무게를 잰 후 수기로 적은 수하물표를 잘 받아두기만 하면 . 시간이 오래 걸릴까, 짐을 못 부칠까 긴장했는데 아무런 문제 없이 금세 짐을 부쳤다. 샤워와 게이트백 모두 마치고 나니 시간도 넉넉해서 탑승구 앞에서 빈둥거리며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우리 비행기는 제시간에 탑승을 마치고, 11시 46분에 이륙했다.



샤워를 하고 탑승하니 몸은 노곤하고, 비투비 콘서트 실황을 보며 좋은 노래를 듣고 있자니 잠이 올 듯도 했다. 하지만 여기는 항공기 안이 아닌가, 쉽사리 들 잠이 아니지. 우리는 평소에 궁금했던 화장실 바로 앞자리를 잡아 앉았는데, 눈치 안 보고 의자를 눕히는 건 좋았지만 아무래도 화장실 소음은 계속 거슬렸다. 노이즈캔슬링이 되는 헤드폰을 쓰면 좀 나았으려나. 괜찮은 자리인지 괜찮지 않은 자리인지 도통 결론을 못 내렸다.



항공기가 이륙하고 안정 궤도에 오른 후, 저녁 식사가 나왔다. 정말 이게 저녁이 맞나 싶은 시간대라 어리둥절. 새벽 1시 40분에 밥 먹는 게 맞는 건가. 그러나 내 입맛은 새벽에도 도망가지 않았다. 스파이시 치킨 메뉴는 딱 양념치킨 맛이라, 과학적으로 맛을 잘 못 느낀다는 상공에서도 맛있다면서 냠냠 먹었다.

기내에서 비몽사몽 자는 것도 자지 않는 것도 아닌 상태로 시간이 흘러갔다. 시간이 절로 잘 흘러갔다기보다는, 마치 거센 파도를 넘는 것처럼 울렁울렁 지나갔다. 피곤한데 잠에는 제대로 못 들고, 자세를 계속 고쳐 앉으면서.



싱가포르 시간으로 새벽 5시경, 창이공항 T2에서 내렸다. 퍼스 행 비행기를 타려면 T3으로 넘어가야 해서 스카이트레인도 타고, 걷고 또 걸었다. 환승이 어렵지는 않았는데 처음 온 곳이라 그런지 이동 시간이 꽤 길게 느껴졌다.



남편은 속이 썩 편하지 않은지 개운한 국물 같은 걸 마시고 싶다고 하더니, 환승하러 가던 길에서 만난 식당에서 사이드 메뉴인 완탕을 하나 주문해 왔다. 남편이 싱가포르에서 먹는 첫 음식인 셈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국물을 떠먹고는 생각보다 덜 기름지다면서 본인의 선택이 좋았다고 뿌듯해 했다. 오후 7시 이후로 벌써 세 번째 끼니라며, 오늘 다섯 끼도 먹겠다는 우스갯소리와 함께.



어두웠던 하늘이 점차 밝아오는 게 느껴지던 싱가포르 창이. 우리는 퍼스 행 7시 20분 비행기로 환승했다. 퍼스 행 비행기는 제법 우리나라에서 멀리 가는 항공편이라는 게 체감되었다. 한국인과 동양인의 밀도는 급격히 낮아졌고, 금발의 백인들이 꽤나 많다는 느낌이 들었다. 귓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언어들 중 한국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우리가 멀리멀리 가고 있나 보다 싶어졌다. 싱가포르까지 6시간을 넘게 비행한 우리는, 다시 퍼스까지 5시간이 훌쩍 넘는 비행을 했다.



도착 전에는 아침을 먹었다. 나는 세 끼째, 남편은 네 끼째. 싱가포르항공 기내식은 내 입맛에 잘 맞는 건지, 잠을 제대로 못 자 비몽사몽 나쁜 컨디션에도 스크램블 에그는 촉촉하고 엣지 포테이토는 짭짤하니 맛있었다.



오후 12시 35분. 드디어! 퍼스 공항에 도착했다. 수속장까지 걸어가는 길, 쿼카 사진이 가득한 안내서를 보고 기분이 좋아지는 우리. 몸은 무겁고 피곤하지만 마음은 들떴다. 가지도 못할 지역까지 지도를 싸그리 챙기는 남편에게서 설렘이 덩달아 느껴졌다. 마음만으로는 호주 어디든 갈 것만 같은 상태였던 걸까.



해가 쨍한 퍼스. 퍼스는 이제 봄에서 여름으로 곧 넘어가는 계절. 이리도 푸르디푸른 하늘이라니. 기념사진을 찍겠다고 공항 밖으로 나섰다. 선글라스 없이는 하늘을 올려다 보지도 못하겠다 싶어졌다. 그런데 바람은 또 서늘해서 그늘에 서면 썰렁하게 느껴졌다. 일교차를 따지기도 전에 같은 시간대에 양달과 음달의 차이조차 이렇게 크면 어쩌자는 거지. 자연스레 캐리어 안에 어떤 옷을 챙겨 왔나 떠올려 보게 되었다.

전철을 타기 전에 생수를 구입하려던 우리는 750ml 물 한 병에 6.9달러, 600ml 물 두 병에 6.06달러라는 안내에 큰 충격을 받았다. 6.9달러면 6,000원이 넘는 돈인데. 호주 생수가 비싸다는 얘기도 들었고, 공항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해도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들 탭 워터를 먹는 건지, 탭 워터 때문에 수요와 공급이 적어서 생수가 비싼 건지 궁금해졌다.



전철역에 도착해 매표기 앞에 서니 마침 곁에 서 계시던 직원 분이 스텝 바이 스텝으로 표 끊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어디 간다, 두 명이다, 단어 하나씩 겨우 뱉으며 버튼을 누를 때마다 직원 분은 엄청 해사하게 웃으며 "베리 굿!", "퍼펙트!" 같은 반응을 보여주셨다. 오, 이 동네 텐션 보통이 아니겠다 싶은 첫 만남. 개찰구에서는 다른 직원 분이, 티켓을 들고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한 우리를 보고는 그냥 입장하라며 손짓해 주고는 곧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려 보였다. 이거 뭐지, 걸음마 한 발짝씩 뗄 때마다 박수받는 기분인데. 이 도시에 대한 기대감이 부쩍 상승했다.



2시 15분 전철에 탑승했다. 목적지는 프리맨틀. 전철을 타고 가는 동안 남편과 나는 역 이름 철자를 보고 전철 안내를 들으며 호주의 영어 발음에 대해 궁금해했다. R 발음은 거의 없네, 워터는 진짜 '오우터'구나. 이 역 이름은 왜 이럴까.



클레어몬트역에서 전철을 갈아타고 3시 16분에 드디어 프리맨틀 역에 도착했다. 중세 도시의 입구 같으면서도 규모는 작아 귀여운 맛이 있는 역사였다. 이번에는 자연스럽게 개찰구를 통과해 나왔다.



이렇게 우리는 남반구, 오세아니아라는 거대한 대륙에 있는 작은 도시 프리맨틀에 드디어 입성했다. 집에서 출발한 지 24시간이 훌쩍 지난 시간이었다.



Nice to meet you, Freman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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