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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카 나라의 침입자

쿼카 가득, 낭만 가득. 로트네스트

by 보듬 Jan 2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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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코니가 없는 집에 사는 나는 여행지에서 '내게 허락된 사적 외부 공간'이 있으면 그리 즐거울 수가 없다. 특별한 용무 없이 들락날락거리며 주변을 둘러보고 날씨를 가늠하는 일이 그저 행복한 사람이랄까. 드디어 오늘은 쿼카를 만나러 가는 날. 발코니에 나가 보니 아침부터 해는 쨍하고, 바람은 선선하니 기분이 들떴다. 벌써 마음은 저 로트네스트 섬에 가닿아 있는 듯이.



조식을 먹었다. 집에서는 잘 챙겨 먹지도 않으면서 여행만 나오면 꼭 채소를 찾아 챙겨 먹게 된다. 샐러드가 어디에 있나 구석구석 살펴보았지만 엽채류가 전혀 없었다. 충격, 대충격. 설마 호주의 호텔 조식은 원래 채소류가 없는 건가? 그렇다면 여행 중 우리의 식이섬유는 무엇이 책임져 줄 수 있는 것인가요. 치아시드와 과일 몇 점으로 식이섬유를 대체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하릴없이 평소보다 과일을 많이 챙겨 먹었다.

조식을 먹은 후, 부지런하게 짐을 정리하고 보니 10시 10분. 체크아웃하며 "해브 어 나이스데이"라는 인사말을 듣고 기분 좋게 호텔을 나섰다.


우리의 배는 10시 45분 출발 예정이었다. 출발 시간 30분 전까지 오라는 안내와 5분 전에는 탈 수 없다는 식의 협박(?)을 예약서에서 읽고는 부지런히 캐리어를 끌었다. 원래 호텔에서 10시에 출발할 예정이었는데 말이야, 양치가 왜 이렇게 시간이 걸렸지.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지금에야 생각나는 거지만, 그 아늑한 발코니에서 사진 한 장 찍을 생각도 못했구. 마음은 왜 이렇게 매일 바쁘기만 한지.



B Shed에 제시간에 잘 도착했다. 아침부터 강렬한 햇빛에 비타민 D를 만들어 가며 로트네스트로 갈 배를 기다렸다. 곧 퍼스에서 출발해 온 페리가 도착했다. 티켓의 QR코드를 찍고 체크인을 하는데, 직원이 짐에 붙일 배달 태그가 필요하다고 했다(하는 것 같다). 하, 진짜, 이 동네 사람들 너무 말이 빨라서 토익보다 오만 배는 어려운 것 같다. 실전이란 이런 것인가. 겨우겨우 단어 하나 주워듣고 눈치껏 때려 맞혀 본다. 무슨 영어 퀴즈쇼 나온 사람들도 아니고 말이야. '직원의 말 듣기 테스트'에서 우린 "Tag", "Red" 같은 단어 겨우 잡아채서 빨간 박스 형태의 티켓 오피스에 달려갔다.
 


우리 앞에 짐을 든 사람들은 다 수하물을 안 부쳤는지. 우리와 함께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눈치껏 티켓 오피스를 들를 생각도 못했다. 우리의 '파워 오브 눈치'도 선례가 없을 땐 힘을 잃는구나. 페리를 제시간에 못 탈까 봐 불안해 서두르고 있는데, 우리 뒤로 줄줄이 태그를 받으러 레드 박스를 찾아 종종걸음 걷는 승객들이 생겨났다.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짐을 맡아준 직원들에게 고맙다 인사하고 태그를 전해준 뒤 드디어 배에 탑승했다. 이제 숙소에 갈 때까지 우린 짐에서 자유로워졌다.



날씨는 엄청 쾌청하니, 물 색깔도 예쁘고 하늘 색깔도 예쁘고. 바깥 풍경이 참 아름다웠지만,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나는 배 안에서 잠에 들었다.


호텔에서 출발할 때 멀미약을 먹어서 졸린 거 같기도 하고, 피로해서 졸린 것 같기도 하고. 파도가 제법 많이 쳐서 배는 바이킹 놀이기구마냥 흔들흔들했다. 파도가 어찌나 치는지 좌우로 흔들, 앞뒤로 들썩들썩. 제법 큰 배인데 왜 이렇게 흔들리는 건지. 잠자느라 풍경은 못 봤지만 멀미약 덕에 졸면서 컨디션이 유지가 된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페리는 11시 25분에 로트네스트 항구에 접안했다. 프리맨틀보다도 더 푸르른 것만 같은 바다를 마주했다. 맑게 반짝거리는 윤슬이 아름다워 눈을 뗄 수 없었다.



드디어 쿼카를 만났다. 으잉! 뭐 이리 귀여운 생명체가!


항구에서 내려 조금만 걸으니 광장이 나타났다. 이곳은 가히 쿼카의 나라 같았다. 광장에는 사람들이 꽤 북적였는데, 쿼카도 사람들만큼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이쯤 되면 사람이 있어서 쿼카가 모인 건지, 쿼카가 있어서 사람들이 모여든 건지. 야행성이라더니 정말 제 꼬리를 앞으로 내밀고 꾸벅 고개를 숙인 채로 잠들어 있는 쿼카들도 있었다. 아침형 쿼카(?)들은 카메라 세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나와 남편은 목적지 없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쿼카를 따라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 누군가가 우릴 보았다면 정신 놓고 헤헤거리며 길 잃은 이들 같아 보였을 것이다.



섬을 한 바퀴 돌기 전에 점심을 먹었다. 배가 도착하고 몰려든 손님들에 피자가 나오기까지 꽤 긴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지만, 주변에 널린(?) 쿼카 구경에 기다림도 할 만한 느낌이었다.


화덕피자는 따끈하고 맛있었다. 토핑이 올려진 부분은 바삭한데 도우 끝 부분은 치아바타처럼 말캉말캉했다. 그러나 피자에 집중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계속 펼쳐졌다. 쿼카와 까마귀에 휩싸여 먹는 자연 친화적 식사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식탁 밑으로 기어드는 쿼카에 시선이 자꾸 가고, 피자를 노리고서 식탁으로 날아든 까마귀 때문에 자꾸 팔을 뻗어 방어 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식탁 밑으로는 환영을, 식탁 위로는 방어를 하느라 바빴다.



그래도 피자집에서 텐션 좋고 친절한 직원 덕에 기분 좋게 식사를 즐겼다. 여기서 만난 사람들, 만면에 미소 띠고 "그레이트!",  "굿!" 자꾸 칭찬해 주는 거 넘 좋다아. 버스 티켓 부스에서도 그렇고 피자집에서도 그렇고. 팁 없는 동네인데 자꾸 쥐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홉온홉오프 버스에 탑승했다. 티켓을 예매하면 자유롭게 타고 내리며 섬을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돌 수 있는 버스. 사실 광장에서 쿼카만 보고 있어도 좋겠다 싶었지만, 바다가 예쁘기로 소문난 동네니까 한번 나서 보기로 했다.

버스 왼편에 자리 잡았다. 버스는 아주 천천히 외길을 따라 섬의 테두리를 달렸다. 기사님의 설명이 이어졌지만 0개 국어 상태인 우리에게 들릴 리 만무했고, 정류장 번호와 이름을 보고 파커 포인트에서 내렸다. 휑하니 사람 몇 없는 바닷가. 깊이 차이 때문인지 푸름의 짙고 옅음이 분명한 것도 신기하고, 정말 푸르디푸른 바다 말고는 그 무엇도 눈에 담기지 않는 풍광이 비현실인 것만 같았다. 물도 얼마나 맑던지.



버스에 다시 올랐다. 갑자기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대체 왜 그 시점에서 잠이 쏟아진 건지는 아직도 의문스럽다. 평소와 다른 바이오리듬이었을까, 한없이 펼쳐진 바다가 평온감을 불러왔을까. 구경하고 싶은 포인트가 여럿 있었지만 두 번 정도 하차한 후 더 이상 내리지 않고 창밖으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난 또 잠들었다. 밖을 충분히 보고 풍광을 즐기고 싶어 아쉬운 마음도 잠시, 나는 버스가 섬의 반 바퀴를 넘게 도는 사이 푹 잠을 잤다.  



깨어보니 다시 섬의 초입에. 쿼카들이 잠에서 깨었는지 더 많아진 느낌이었다. 쿼카에게 곁을 내어주고 한참 앉아 있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마트에 들렀다가 숙소로 향했다.




숙소에 오니 짐도 미리 도착해 있고, 방도 더 큰 방으로 업그레이드되어서 더 좋았다.



방 구경을 마치고 침대에 누워서 뒹굴거리는 시간. 화장실에 손 씻으러 간 남편이 화들짝 놀라서는 나를 불렀다. 세면대 아래에 까만 덩어리가 움직이는데, 아니, 저것이 쿼카네? 우리 숙소에 침입한 쿼카는 쓰레기통을 엎더니 유유히 거실로 나와서는 이리저리 휘젓고 다녔다. 아예 소파에 오르더니, 침대까지 점프. 막상 침대로 뛰어오르기는 잘 오르더니, 내려오지는 못해서 남편이 캐리어로 계단을 만들어주고야 내려왔다. 마치 우리가 침입자 같았을 정도로 쿼카의 행동은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내보내야 할 것 같아서 망고를 들었더니, 달려들며 번쩍 서서는 금세 텐트 밖으로 쫓아 나왔다. 문을 잘 닫으라는 안내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저녁을 먹으러 나가기도 귀찮은 데다, 식당이나 상점들이 일찍 닫는 지역 특성상 밥은 숙소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점심에 먹고 남겨서 싸 온 피자를 데웠다. 피자 데우니 쿼카 세 마리가 텐트 방충망 밖에서 얼쩡거린다. 텐트 밖 테이블에서 먹으려고 했던 걸 포기하고 실내 소파에 앉아서 먹었다. 이쯤 되면 오히려 우리가 쿼카의 구경거리는 아닌가 싶어지는 듯도 싶고. 아까 광장에서 더 쿼카를 만나지 못하고 왔던 아쉬움을 가라앉히는 등장이라 우린 감사하기도 했다. 애처로운 표정을 보고 뭣하나 주지 못하는 건 좀 안타깝기도 했지만, 그게 맞는 거니까.



저녁 바닷가 산책에 나섰다. 숙소가 위치한 핑키 비치는 이름 그대로 하늘이 핑크색이었다. 노을과 바다를 배경으로 셀카를 찍으려 쭈뼛거리고 있자니, 옆에서 와인잔 들고 서서 일행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언니(?)가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다가왔다. 멋있었다. 어떤 지점이 멋있었지, 와인잔인가, 자연스러운 호의인가, 그냥 이 분위기인가, 다인가. 고마운 마음에 "Did you.." 물으려니 "얼레디""라며 웃으셨다. 누가 봐도 여유로이 홀리데이를 즐기고 계시는 느낌이었다.


등대에 올라가는 길목에서도 벤치에 앉아 와인을 마시며 노을 구경하는 커플을 만났다. 사람 사는 거 똑같다고 와인과 노을을 예쁘게 사진에 담으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보였다. 와인과 노을이라니. 낭만 가득한 사람들. 낭만의 로트네스트.



핑크색 하늘은 점차 붉게 타오르고, 어둠을 불러왔다.



리조트 주변의 쿼카는 활동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해변에도, 리셉션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 우리가 쿼카의 나라에 왔구나! 실감하며 텐트로 향했다. 내일도 또 쿼카를 더 많이 만나야지 기대를 가득 품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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