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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쿼카뿐

쿼카 나라 탐방기

by 보듬 Feb 1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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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비가 많이 내린 것 같다. 새벽에 우르르 쾅쾅 텐트 천장을 거세게 두드리는 듯한 소리에 잠을 설쳤다. 어제 숙소에 쿼카가 들어왔던 게 뇌리에 박힌 탓이었을까. 텐트 천막을 모두 잠가 놓고 잠들었으면서도, 밤중에 깜깜한 상태에서 화장실을 가려고 하다가 혹시 내가 뱀이나 쿼카가 들어온 걸 모르고 밟지는 않을까 잠깐 걱정을 하기도 했다. 아주 우스운 생각이었지만, 잠결에는 제법 진지했다.


어제저녁부터 공기가 차가워지고, 코끝이 시려졌다. 숙소에 라디에이터와 두꺼운 담요가 두 개 더 마련되어 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담요가 없었다면, 라디에이터가 없었다면, 우리는 부리나케 짐을 챙겼을지도 모른다. 7시 45분에 맞춰둔 알람이 진동으로 울리는데, 나는 꿈속에서 '누군가의 휴대폰이 진동인가 보다'하고는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내 휴대폰에서 나는 진동임을 알아챘다.


로트네스트까지 온 여독이 알게 모르게 몸에 스며 있는 걸까?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니 제법 추운 날씨에 웅크리고 자느라 찌뿌둥한 몸이 좀 풀렸다. 날이 어둡고 비가 내리고 자꾸 천둥은 치니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될까, 고민이 좀 되었다. 데크 위 식탁은 다 젖었어도 의자는 다행히 젖지 않아서 데크에 나와 잠시 앉았다. 커다란 담요 두르고 앉아 비 구경하며 반쯤은 멍 때리는 시간. 카트를 타고 온 리조트 직원이 리조트 여기저기를 살펴보더니 "굿모닝" 인사를 한다. 나도 째깍 "굿모닝" 해주고 "하와유"라는 질문에 "파인 땡큐"까지 했다. '앤 쥬" 라고 물었어야 했나. 너무 교과서 같아서 자꾸 의식되잖아. 말이 빨라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지만 오늘 하루 어떨 것 같냐고 묻는 것 같아 "레이니이" 하며 우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리 들어도 사람들 말이 너무 빠른 데다 현재 0개 국어인 자로서는 이들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호주 사람들, 제법 스몰토크의 달인들이라니 경험해 보고 싶었는데 내 밑천이 너무 없네.


비가 많이 와서인지, 이른 아침이라서인지 쿼카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밤새 활동하고 비 피해서 어디선가 자고 있겠지. 비를 그냥 맞으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보인다. 이 정도 비는 아무것도 아닌 건가. 아이들이 앉은 트롤리까지 끌고 가는 자전거도 많았다.


호주 입성 후 두 번째 호텔에서의 첫 조식이다. 샐러드 같은 채소류는 역시 없었다. 정말 채소 없이 살아지나요, 아니면 조식을 제외한 다른 식사 때 우걱우걱 챙겨 먹나요. 샐러드가 없는 아쉬움을 과일 몇 조각으로 달랬다. 코코넛 맛이 나는 치아시드를 한 스푼씩 퍼 먹으며, 남편과 나는 한국인과 타국인들의 유전 형질에 대해 궁금증을 키우는 시간을 보냈다. 미국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에 비해 체격이 커질 수도 있고 당을 잘 견디는 췌장을 갖고 있대, 호주인들은 엽채류 없이 무엇을 통해 장 건강을 지킬까, 이런 얘기들. 아침 식탁에서의 대화치곤 흔한 주제는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밥을 먹다 만난 새 한 마리. 여긴 식당으로 새가 날아들어 빵을 쪼아도 놀라 호들갑 떠는 이가 없었다. 나만 푸드덕하고 날아다니는 새에 주목했을 뿐.


식사 후 돌아오는 길에 비를 쫄딱 맞았는지 흠뻑 젖은 쿼카 두 마리를 보았다. 오늘의 첫 쿼카다.


오늘의 일정은 빈둥빈둥거리며 쿼카를 만나는 것뿐. 아침을 먹고 숙소에 돌아와서 쉬었다. 해가 좀 나고 비가 좀 멎어서 기분이 덩달아 밝아지는 것 같았다. 여행 와서 책을 한 권 읽는 것도 '하고 싶은 일' 목록에 있었는데, 남편이 침대 위에서 졸고 있을 때 나는 데크에 나가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책을 읽었다. 여전히 우리 숙소 주변에 머무는 쿼카들은 아직 안 일어났는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숙소 바로 앞 숲길에 쿼카들이 많다고 해서 혼자 산보도 나갔다 왔다. 자전거들이 이리저리 오고 가는 길목 한 켠에 동글동글한 쿼카 똥들이 잔뜩. 쿼카가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똥을 피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 보니, 해를 피해 그늘에서 고개를 푹 숙이거나 땅에 온몸을 밀착한 채로 잠자고 있는 쿼카들이 꽤 많았다. 잠을 방해할 순 없어서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고 돌아왔다.


오늘의 점심은 서브웨이. 한국에서 주문해 보았던 가닥으로, 메뉴를 고르고 빵을 고르고 토스팅을 요청하고 할라피뇨를 뺀 모든 채소를 달라고 말하고 뿌듯해했다. 한국이나 호주나 방식이 다르지 않아서 다행이었지, 암암. 뭐랄까, 동남아나 일본에 여행 갔을 때처럼 현지인들마저 '외국어'로 쓰는 영어를 접할 때와는 다른 기분이 들었다. 모국어로 영어를 쓰는 사람들과의 대화라니 생경하기도 하고, 큰 도전 같아서 살풋 두렵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오고 가는 쿼카를 구경하고, 식사 후에는 항구 앞에 앉아서 배 들어오는 것도 바라보고, 기념품 가게에도 들렀다.


원주민들과 로트네스트의 역사를 보여주는 박물관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이 아름다운 섬은 영국과 네덜란드와 중국 등의 침략을 받는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왜 아픈 역사를 가지지 않은 나라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걸까. 소수의 나라들이 지구가 마치 모두 자신의 땅인 양 점령하고 다녀서인지, 어디서든 침략자의 위치에 익숙한 이름들이 반복된다. 이 멀고 먼 나라 제국주의의 그림자들을 마주하는 건 씁쓸하다.


순전히 쿼카를 보러 온 우리는 마을에서 발길 닿는 대로 다니며 쿼카를 계속 만났다. 마음이 푼푼하고 행복한 시간들을 보냈다.


마트에서 저녁거리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돗자리를 챙기고 맨발로 데크를 걸어 숙소 곁에 있는 핑크비치로 갔다. 모래가 어찌나 고운지. 해는 뜨겁기 그지없는데, 모래는 참 부드럽고 고운 데다 시원하고 촉촉한 느낌이었다. 물에도 발을 담갔다가 나와, 햇빛 아래 돗자리를 펼치고 앉아 발을 모래에 묻어도 보았다. 어쩌면 그다지도 의미 없을 행동들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괜히 모래를 마구 파기도 하고 모래성을 높이 쌓고 수로를 내 보기도 했다. 아무런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는 동시에 제약도 조건도 없는 놀이였다. 주변에는 친구들과 카드놀이를 하는 무리, 혼자 바다를 보며 책을 읽는 한 사람, 돌아가자는 아빠 말 안 듣고 모래밭을 뛰어다니다 결국 옷깃을 잡혀 숙소로 가는 아이를 보기도 했다. 여유롭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여행이 끝나고 돌이켜 보면 그리울 순간이랄까. 여행 삼일 째인 오늘까지의 감상도 남편과 나눴다. 우리는 호의적이고 잘 웃는 사람들, 팁이 없는 문화, 좋은 자연환경 덕에 여행의 재미가 느껴진다는 데 동의했다.


저녁은 마트의 레토르트 음식과 컵라면. 큰 기대 없이 먹으니 먹을 만했다. 대단치는 않더라도 텐트 생활에 제법 어울리는 메뉴였던 듯도 싶다.


내일은 또 새로운 곳으로 가는 날. 막상 떠난다 생각하니 아쉬움이 그득해졌다. 로트네스트는 부족할 것 하나 없는 여행지였다. 너무도 먼 나라지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동물이라는 쿼카의 웃는 입 모양을 생각하면 다시 올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바람이 어마어마한 이 작은 섬. 쿼카 때문에 쥐의 둥지라고 불리게 되었지만, 오래전부터 물을 건너는 곳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이 섬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충분히 산을 넘고 물을 건널 이유가 있겠다고. 집으로 돌아가서도 이곳을 그리워하게 되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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