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신

17. 권혁봉의 아들, 권계성

by 가랑비메이커

나의 아버지, 당신에 대하여

21명의 자녀들이 이야기하는 나의 아버지


당신은 매일 양복을 만들었다. 양복 한 벌에 한 달 학원비, 양복 한 벌에 외식 몇 번. 양복 한 벌에 자식들 생활비. 그러는 사이, 안에서는 신장 하나가 잘려 나갔고 밖에서는 당신의 정교한 다림질로도 펼 수 없는 주름이 새겨졌다. 주름 하나하나에 세월이 깊이 고였다.



어느 여름밤 당신이 신음했다. 이마를 만져보니 열이 펄펄 끓었다. 얼굴은 안개처럼 창백했다. 식은땀이 온몸을 뒤덮었고 머리가 젖었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낸 것은 처음이었다. 당신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내 얼굴색이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순간 건조해진 얼굴에 이내 열이 올라 뜨거워졌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두려움 속에서 나는 무력했다.

응급실에서 안정을 취한 후, 다음날 오전에 진료를 받았다. 신장 하나를 제거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이 칼처럼 꽂혔다. 식단 조절만 잘하면 신장이 한쪽 없어도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다고 했다. 당신은 입원복을 입었어도 손님의 양복이 완성되지 않았단 걸 걱정했다. 미련한 사람. 시간이 당신을 재촉하는 것 같았다.


당신이 잠든 밤, 입원실 한쪽에 우두커니 앉아 창문을 본다. 얼룩진 창문 밖으로 보이는 수많은 흔들림. 태풍이 지나는 중이란 예보가 있었다. 원단 자르듯 잘라낸 당신의 세월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 흔들림에 나는 당신의 연약한 어깨만큼 슬펐다.

혹여 어린 내가 떨어질까 봐 마음껏 업어보지도 못하던 사람. 이제껏 자식은 한 대도 때려보지 못한 사람. 목욕탕에서 등을 밀어줄 때도 혹여나 피가 날까 간지럽게 쓰다듬던 사람. 그러니까 당신은 자식 앞에서 한없이 여린 사람이다.


20년 전 사진을 본다. 양복점 안에서 당신은 어린 나를 끌어안고 기쁨과 불안의 표정을 겹쳐놓은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유일하게 나를 안고 있는 사진 속 당신의 두 손이 무척 조심스럽다. 지금과는 달리 주름 없고 활기찬 모습의 당신. 신장 두 쪽이 온전하던 시절의 청춘이 나와 눈을 마주한다. 나는 눈시울이 붉어져 천장을 바라보며 수십 번 깜박였다.

지금의 당신을 바라본다. 눈앞의 당신과 사진 속 당신의 모습이 만들어낸 낙차로 나는 처절하게 아프다. 사진 속 당신은 닿을 수 없는 소원처럼 저 멀리 과거에 있다. 형언할 수 없는 슬픔에 고개를 숙인다. 당신은 어떤 세월을 지나, 지금 이 순간에 도달한 것일까. 푸르던 청춘이 노을처럼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당신은 매일 양복을 만들었다. 양복 한 벌에 한 달 학원비, 양복 한 벌에 외식 몇 번. 양복 한 벌에 자식들 생활비. 그러는 사이, 안에서는 신장 하나가 잘려 나갔고 밖에서는 당신의 정교한 다림질로도 펼 수 없는 주름이 새겨졌다. 주름 하나하나에 세월이 깊이 고였다.


암 보험에 가입했어. 대비는 해두는 게 좋지.


고기는 나중에 먹자며 머리를 긁는다. 두 귀가 뜨거워진다. 당신은 끝까지 미안해하는 사람이다. 퇴원 다음 날, 아침 일찍 양복을 만들러 나가는 당신은 손님의 시간과 아들의 삶을 위해 오랜 시간 자신의 생을 지워나갔다. 희생을 동력으로 세월의 한 페이지가 넘어갔다.

넘어간 페이지 속 당신의 신장이 하나 사라졌다. 나는 다음 페이지를 생각할 때면 무너진다. 다시 어린아이가 되고 싶었다. 작아지는 당신의 삶을 상상할 수 없던 시절이 그리웠다.

늘 그랬듯 당신은 아침마다 가게로 나가 양복을 만든다. 어떤 슬픔을 재단하고 희생의 다림질을 한다. 늦은 밤마다 축 처진 어깨를 이끌고 돌아오는 당신의 빛바랜 옷을 본다. 그 뒤로 허망한 세월의 향이 퍼진다. 당신의 낡은 옷이 삶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또다시 울었다.

당신이 없다면-.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해봤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향해 가지만 당신이 그럴 줄은 몰랐다. 갑자기 시야가 흐려지고 막막해진다. 당신이 현실밖에 존재하여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면, 기억으로만 남는다면. 나는 다시 두려워졌다.

당신이 나간 후 비스듬히 펜을 들어 당신을 적는다. 감당할 수 없다는 걸 금방 깨닫는다. 머릿속에서 죽음이란 단어를 지우고 그 위에 현재를 덮어쓴 채 당신을 바라본다. 당신이 다시 쳐진 그림자를 질질 끌고 돌아온다.

오늘도 당신은 조금 늙었다. 사랑한다는 먼지 쌓인 말을 꺼낼 때가 왔다.






책 구매하기


21명의 자녀들이 이야기하는 넓고 깊은 아버지.

자녀에게도 아버지에게도 위안이 될 단 한 권의 책

이전 16화ABC와 프라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