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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현 Oct 11. 2022

16-19일 차 : 시간을 달리는 법

샛별,외돌개-할망바위,동백꽃,잠결,소개,산방산 전설,위선,난조,밥심

16일 차


샛별


어제 본 그 별을 다시 찾았다. 아무리 봐도 금성인 것 같아서 별지도 어플을 이래저래 만져서 다시 인식시켜 보니 역시 위치 인식에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바로 잡고 보니 그 별은 금성이 맞았다. 사진을 보여줬는데 인공위성이 아니라 진짜 별이라는 걸 나의 도시 지인들도 잘 믿지 않았다. 나는 종종 친구들과 대화하다가 서울 하늘에 보이는 별들이 인공위성 따위가 아닌 진짜 별이며, 서울에서도 북두칠성을 볼 수 있다고 성토하곤 한다. 잘 믿어주지 않지만 다들 반쯤은 놀라워한다. 하지만 북두칠성이 보인다는 말은 대부분 의심했다. 내 인생에 몇 안 되는 낭만적인 연애사가 증명하고 있는데 연애사 자체도 썩 믿음이 가지 않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혼자 지낸 지 오래되긴 했으니까.


그렇게 도시 사람들은 서울 한복판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꽤 오래도록 별 하나의 빛을 눈에 담아야 서서히 눈에 들어오는 일곱 개의 별을 믿지 못하고 잊고 사는 것처럼 너무 밝은 별을 믿지 못한다. 인공위성이 아니라 무수한 별빛 사이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우리는 자주 잊곤 한다. 그런 도시에서 나는 아팠다.


육안으로도 선명하게 보이는 새벽의 행성을 매일 눈 뜰 때마다 볼 수 있다니. 오래도록 바라보면 주변의 별도 조금씩 보인다. 완전 남향이라 그런지 낮달은 봐도 창밖으로 새벽달을 보는 일은 드물다. 아마도 내 머리 위에 떠 있는 기간이 긴 것 같다. 달의 움직임을 따라가기엔 그만한 열정도 지식도 없다. 그저 눈에 보이기를, 보이지 않는다 해도 거기에 있기를, 그렇게 믿을 뿐이다.

밤에 달을 발견하고 바라보다 와도 새벽에는 어딜 갔는지 달은 잘 보이지 않는다. 대신 금성이 밝은 빛으로 나의 새벽을 밝혀준다.



외돌개-할망바위


가족들이 찾아왔다. 겨우 2주 동안 혼자 살았는데 갑작스럽게 북적북적해진 주변이 어색했다. 가족들과 함께 살았던 때가 아주 먼 과거처럼 아득했다. 동생과 아빠는 다른 방을 잡았고 엄마는 나와 함께 자기로 했다. 오자마자 내 방 구석구석을 살피며 내 살림살이를 확인하는 게 엄마의 애정표현 방식이었다. 나도 조금 들떠서 살림을 자랑했다. 그리고 부족했던 것들을 채워줄 살림도구들을 가져왔냐고 엄마를 닦달하기도 했다.


오랜만에 바퀴 달린 물건에 올라타니 기분이 이상했고 조금 멀미가 나는 듯도 했다. 서울에서는 밥 먹듯이 지하철,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여기서는 매일 걸어 다녀서 차에 올라탄 느낌 자체가 어색했다. 아리송한 기분이었다. 농담 삼아 차를 처음 타본 사람처럼 감탄사를 내뱉고, 시가지 쪽으로 갔을 때 '와, 별세계다, 별세계. 완전 다른 시대네.'하고 높은 건물들에 반응했더니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가 살던 서울에 비하면 도시라고 하기엔 한없이 나지막하고 한적한 시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차를 타고 내가 무척 사랑하는 외돌개 산책로에 도착했다.


아빠가 제주지사에서 일했던 몇 년 동안 제주도 여행을 많이 했다. 제주도에 올 때마다 찾아갔던 몇몇 장소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외돌개였다. 내가 특히 좋아했다. 언니가 좋아한 산굼부리, 내가 좋아한 외돌개. 제주도에 오면 꼭 거치는 산책로들이었다. 서울로 이사 가기 전에는 매년 섬진강 쪽으로 가족여행을 가곤 했는데 이사 후에는 전라도보다 제주도가 더 가까워졌다. 거리감은 자로 잰 것만이 아니라 교통수단에 따라 달라지나 보다. 말하자면 공간보다 시간과 속력, 그리고 편안함이 거리감을 좌우한다. 전라도까지 차나 버스를 타고 덜컹이는 차체에서 대여섯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편안한 공항 리무진을 타고 공항에 가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까지 가는 서너 시간이 실제 거리와 관계없이 '가깝다'는 감각을 속인다. 그게 우리가 연결되는 방식이다. 그렇게 교통이 결정하는 거리감에 따라 어린 시절의 나는 섬진강변에 가까이 서 있고 청소년기의 나는 외돌개에 가까이 서 있다. 그리고 오늘은 정말로 외돌개 앞에 다시 섰다.



어릴 때는 외돌개 산책로가 그렇게 길었는데 어느새 그 정도 길은 순식간에 걸을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왔을 때가 학부 때이니 키가 더 자란 것도 아닌데 이곳이 기억하는 것만큼 광활하지 않아서 약간 당혹스러웠다. 무엇이 달라진 걸까? 내 발 크기도 보폭도 키도 다 그대로인데 이곳은 나에게 더는 드넓은 공간이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곧 아름다운 경관에 쏟아지는 영감을 받았으니 중요한 것은 달라지지 않은 모양이다. 그냥 마음이 더 자라서 내 세상이 외돌개가 바라보는 바다보다 더 넓은 망망대해를 품게 되었나 보다.


외돌개와 그 앞 산책로는 아주 어릴 때부터 세상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싶었던 내 소망을 대변해주던 영감의 땅이다. 아직도 나는 세상을 마주하기엔 모자라지만, 외롭게 솟은 이 바위를 여전히 사랑한다.


그러나 할망바위가 외로이 서 있긴 해도 전설처럼 통곡하다 망부석이 되었다고는 나는 믿지 않는다. 그는 의연하게 바라보았을 것이다. 가족을 삼켜버린 바다를, 혹은 떠나간 사람들의 뒷모습을, 섬에 남겨진 자의 눈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을 기억하며 아주 오래도록 바다와 섬과 하늘을 고요히 바라보고 또 바라보다가, 외로움과 상실감에 지친 삶들을 지키는 장군처럼 아주 단단하게 굳어갔으리라. 나는 그렇게 믿는다.



동백꽃


엄마는 동백꽃을 좋아했다. 어릴 때 학원 버스를 기다리며 다른 꽃봉오리에 비해 단단하고 겹겹이 쌓인 씨앗처럼 생긴 동백꽃의 봉오리를 수도 없이 벗겨냈던 내가 부끄러울 만큼 지금의 나도 동백꽃을 좋아하는 편이다. 어린 시절에는 그렇게 단단한 연둣빛 봉오리를 한 겹 한 겹 뜯어내면서 학교와 학원 사이의 시간을 버텨냈던 것 같다. 사실은 너무 어려서 답답한 막에 둘러싸인 것 같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은 느낌을 떨쳐내고 싶었는데 그런 울분을 애꿎은 동백나무에 풀었던 것 같아 미안하다. 아직 피지도 않은 꽃을 억지로 한 장 한 장의 꽃잎으로 떼어내 버리던 그 겨울날들이 선명하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바쁜 아빠를 대신해 혼자서 삼남매의 하루를 책임지고 다른 집 아이들을 가르치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엄마의 울분은 눈치 채지 못했다. 연고 없는 도시에서 몇 년을 홀로 육아와 가사, 돈벌이에 시달리기엔 너무 젊었던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지금도 나는 그 마음을 들여다볼 만큼 어른이 되지는 못한 것 같다. 다만 나는 그날들의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었고 그래서 엄마에게 참 미운 행동을 많이 했다.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도 더 사랑해달라고 지친 엄마를 너무 보챘다. 완벽하게 내가 바라는 사랑의 방식이 아니었다 해도 그 모든 게 사랑이고 애정이었다는 걸 지금은 조금은 이해하고 있다.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라 나와 많이 달랐고 많이 벅찼을 뿐이었다. 나는 받으면서도 받는 줄 몰랐던 어린아이였고.


빵집까지 걸어가는 길가에 조금씩 동백꽃이 피어있었는데 그걸 보면서 엄마가 오면 이 길에 있는 동백꽃을 보여주려고 했었다. 그런데 아빠가 엄마를 위해 동백나무들이 가득한 수목원으로 향해서 소박한 동백꽃 몇 송이를 보러 가자는 말은 쏙 들어가 버렸다. 그래도 수목원은 예뻤고 그다지 예뻐한 적이 없었던 동생과 사진을 찍고 같이 다니면서 나름대로 사이좋은 남매처럼 굴기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엄마와 아빠는 꼭 신혼부부처럼 다정해 보였다. 사진을 찍다가 엄마, 아빠와 떨어지게 된 우리 남매는 사람보다 배로 큰, 커다란 솜사탕 같은 동백나무들 사이로 기웃거리다가 쪼그리고 앉아 엄마가 신고 있던 신발을 찾았다. 나중에 만나고 보니 엄마, 아빠도 나무 아래로 고개를 숙여 오가는 신발들 속에서 우리를 찾았다고 했다. 생각하는 게 거기서 거기인 게 참 가족다웠다.



잠결


밤늦게 집으로 돌아와 누웠더니 잠이 쏟아졌다. 아직 약을 감량하느라 애먹고 있어서 바로 깊이 잠들지는 못하고 한참을 뒤척였다. 그러다 분명 들었다. 뒤척이는 나를 쓰다듬으면서 엄마가 그랬다.


장하다, 우리 딸.

대견하다, 우리 딸.


그렇게 반복했다.


아주 오랫동안 듣고 싶었던 말, 아무 이유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해주기를 바랐던 말이었다. 누구보다도 엄마에게서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내가 사랑받는다고 느끼게 하는 말은 바로 그런 인정의 말이었다. 성적이나 어떤 성취가 아니라, 그냥 내가 살아내고 있다는 것에 대한, 내 존재에 대한 인정의 말이었다.

잠든 딸에게 속삭이는 엄마도 나처럼 표현이 서툰 사람이었던 걸까, 아니면 꿈이었을까. 결국 쑥스러워 물어보지 못했지만 꿈이 아니었다고 믿는다. 고마웠다.




17일 차


시간을 달리는 법


샛별을 보며 어둠 속에서 요가를 하고 운동을 하러 나갔다. 나 홀로 잠들던 침대에 엄마가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엄마를 깨우지 않으려고 불도 켜지 않은 채 움직이다가 막 어둠이 걷힌 바깥으로 나와보니 아직도 달이 노랗게 떠 있었다. 마치 해처럼.

달리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해가 수면 위로 떠올지 않아서 일출 직전의 붉은 하늘을 등지고 왔다. 그리고 정말로 해가 떠오르고 아침이 밝았다. 꼭 밤에서 아침으로 달려 건너온 기분이다. 그 이상한 상쾌함 속에서 내일도 달리고 싶어졌다. 쉬는 날이고 무리하면 무릎이 상하니까 참으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렇게 몸을 움직이고 싶어 하고 숨이 차는 순간을 즐기는 내가 낯설고도 반갑다.


단백질을 섭취하고 씻고 나와 쉬고 있는데 엄마가 자다 깨다 하며 계속 몇 시냐고 물어왔다.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흘러서 아무리 기다려도 8시가 오지 않는다. 아침엔 시간이 정말 안 가, 엄마. 우리가 달려서 뛰어넘어야 해.

그런 엉뚱한 대답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소개


찾아온 가족들에게 내가 매일 걷는 길을 소개하는 순간은 짜릿하다. 나는 잠시 이곳의 일원이 된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가족들이 아니라 이쪽에 더 속해 있는 듯한 그런 기분. 서울에서 멀어진 듯한 그 감각이 간질간질했다.

씻고 제대로 말리지 않아서 여전히 젖어 있었던 히피펌을 한 머리카락, 수면을 가르고 솟아오른 바위들, 건조하지만 강한 돌풍, 구름 너머로 고개를 내민 태양, 그 아래 언제나와 같은 범섬.

반쯤 얼어붙은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새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모두에게 바다를 소개한 아침이었다.



산방산 전설


바닷가를 산책하고 산방산 쪽으로 향했다. 산방산은 한라산에서 무너져 내린 봉우리라고 한다. 커다란 한라산에서 독립해 나온 산의 거친 암벽이 그 위용을 자랑했다. 압도적이다. 근방의 도로를 달리고 있으면 깎아지른 절벽들로 이루어진 그 큰 바위산이 우리를 내려다본다. 하지만 아무것도 쏟아져 내려올 것 같지 않은 산이기도 하다. 흙이 아니라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어서 부서지더라도 무너지지는 않을 듯하다.


산방산에는 옥황상제, 승려, 영웅, 진시황, 그리고 여신의 전설이 석굴처럼 잠들어 있다. 여기서도 옥황상제는 또 바위산을 집어던진 성질 나쁜 놈이다. 옥황상제가 만들어낸 자연물들은 폭력적이고 잔인한 면모에서 태어난다. 설문대할망의 전설과는 많이 비교되는 부분이다.


산방산 앞은 유채꽃으로 유명한 서귀포에서도 손에 꼽히는 유채꽃 명소로 알려져 있다. 물론 나는 법환마을 올레길의 유채꽃길이 더 예쁘다고 생각하지만, 산방산 앞에 있는 유채꽃밭들은 유채꽃이 만발한 사이에서 산방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만의 매력을 갖는다. 산방산 앞에 처음으로 유채꽃밭을 가꾼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런 풍경과 관광 상품을 누가 만들었을까?


제주도를 그저 관광지나 소비의 공간으로 여기는 것을 당연시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어쩐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다는 입장료 천원은 관광상품 이상의 의미를 상상하게 한다. 이를테면 기묘한 제의적인 의도 같은 것을 말이다. 산방산의 전설을 숨은 이야기로 남겨두려 하고, 강렬한 노란빛으로 압도적인 바위산의 기세를 막아보려는 그런 제의를.




18일 차


위선


좋았지만 오랜만에 사람들과 함께하니 힘들기도 했던 이틀 간의 여행은 어떤 충돌하는 감정들을 동반했다. 무엇보다도 마음에 걸렸던 것은 먹는 일이었다. 육류와 유제품 소비를 줄이겠다는 마음이 절로 탄성이 나오는 풍경이나 아늑한 분위기에, 그리고 남이 해주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편안함에 쉽게 흔들렸기 때문이다. 특히 어제 점심때 산방산 근처 용머리 해안이 내려다보이는 식당에 갔을 때 찝찝함을 안고서도 너무 즐기는 내 모습이 불편했다. 최대한 채소 위주의 음식을 주문하려고 하긴 했지만 막상 음식이 나오니 안 먹던 소고기와 치즈에도 손이 갔다. 할 수 있는 만큼만이라도 조금씩 해나가면 되는 일이라곤 하지만 신념이 흔들리는 순간에 스스로가 곱게 보이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런 마음이 있어야 다음에는 달라질 수 있기도 하다. 그렇게 육류 앞에서 너무 즐기고 있는 내 모습이 마음속에 불편한 그림자를 남겼다.


그리고 저녁은 많이 달랐다. 가족들이 제주도에 온 만큼 육류를 먹고 싶어 했고 나도 돼지고기는 줄이고 있는 중이지 완전히 소비하지 않으려는 마음은 아닌 단계였기에 혼자서는 잘 안 먹으니까, 그런 마음으로 처음엔 큰 거부감이 없었다. 하지만 막상 식당에 도착했을 때 들은 말들이 비수처럼 꽂혔다. 하나의 생명이 근고기, 백돼지, 흑돼지, 그런 단어로 분류되고 부위별로 조각나 불려지는 광경이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하다는 사실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제와서야 그런 표현들이 마음에 걸려서 나는 어쩐지 조금밖에 먹지 못하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점심때 용머리해안을 바라보면서 해안 끝에서 연기를 뿜어대는 화력발전소에 대한 비판이 오갔었다. 그 비판의 중요한 근거가 경관을 해친다는 점으로 일축되기도 했다. 그저 털색이 다를 뿐인 돼지들이 맛조차 다른 식품으로 유명해졌다는 사실이 주는 불편함과 환경파괴에 대한 비판이 심미적인 문제로 모아지는 순간이 비슷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같은 시선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소비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조금쯤은 줄여나가면서, 덜 유해한 동물로 살아갈 수 있겠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나는 조금씩 노력해보고 싶다. 소극적이었던 지금까지 보다 좀 더 많은 노력을 하고 싶어졌다. 많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나의 일상이라도 바꿀 수 있기를.




난조


가족들을 배웅하고 앓아누웠다. 이틀간 많이 이동하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데다 달거리까지 겹쳐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도 씻고 눕긴 했는데 무슨 정신으로 씻을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날도 잔뜩 흐리고 비도 오고 추웠다. 두통이 생길 정도로 잠을 잤지만 생리통도 심하고 식욕마저 잃은 상태라 가만히 누워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누워 있는 내내 엄마의 뒷모습이 계속 눈에 밟혔다.


어젯밤 옷상자를 정리해주던 엄마, 새벽 4시에 깨어난 딸이 다시 침대로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다시 잠들던 엄마, 아프다며 아침 산책도 취소해버린 딸을 위해 방청소를 해주던 엄마... 엄마는 그런 모든 일들을 기쁘게 했다. 엎드려서 엄마에게 그랬다.


내가 생각보다 잘 지내서 좀 그랬지, 엄마 없이도 혼자 잘 지내는 것 같아 좀 그랬지?

그런데 나는 혼자 등에 파스를 붙이다가 엄마에게 붙여달라고 하고 싶었고 청소할 때 편하라고 여기까지 밀대를 가져다준다는 엄마를 기다렸어.


내 말에 엄마는 웃었었다. 나는 혼자 남았고 고요 속에서 진통제를 먹고 누워있다. 나를 꼭 안아주고 서울로 돌아가던 엄마의 뒷모습이 아른거려서 함께 수목원을 걷는 나와 엄마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결국 그리움에 조금 울어버린 건 나였다.




19일 차


밥심


가족들이 돌아가고 몸이 안 좋아서 계속 누워있다시피 했다. 하지만 누워있기만 하면 있던 힘도 사라지는 것 같다. 예전에는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힘이 나는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다. 오히려 조금쯤 움직이고 무언가에 집중할 때 회복되는 것 같다. 일어나서 방을 왔다 갔다 하기만 해도 누워있을 때보다는 나은 듯하고, 스트레칭을 하니 찌뿌둥한 몸이 풀려서 더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교환학생 시절 외국에서 혼자 살았을 때도 그랬다. 작은 부엌이 그렇게 좋았다. 동네를 가로질러 장을 보러 가고 익숙해진 마트를 같은 동선으로 한 바퀴 돌고 비슷한 식재료를 사서 집으로 돌아오고, 작은 냉장고를 채워 넣고 기지개를 한 번 한 후 갓 사온 신선한 재료로 간단한 요리를 해서 배를 채우는 일. 그게 그렇게 재미있었다. 가끔은 수육이나 전 같은 요리다운 요리를 시도해보기도 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는데 쉽지도 않아서 가끔은 우스꽝스러운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가령 한 번은 냄비를 태웠고 한 번은 전 부치다가 연기가 나서 내 방의 화재경보기가 울렸다. 당황해서 의자에 올라 화재경보기의 수동 장치를 눌러 경보를 해제하고 내려왔을 때 잠시 멍하니 서 있기도 했었다.


그런 나날들이 가장 좋았다. 유럽 여행보다도 그런 시간들이, 그 작은 부엌에서 보낸 시간들이 더 소중했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1년에 한 번 라면을 먹을까 말까 한 나인데도 아프니까 라면 국물이 생각나고, 식사를 맛있게 챙겨 먹어도 쌀을 먹지 않으면 힘이 나지 않아서 밥알을 씹지 않고는 이틀을 넘기지 못하며, 간장과 참기름 없이는 요리를 하지 못하고, 된장찌개, 김치찌개, 고추장찌개를 돌려먹을 때 행복해하는 걸 보면 나는 분명 한국인이라는 것을. 밥심으로 살아가는 한국인 말이다. 매운 것도 떡볶이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평생 먹은 떡볶이보다 더 많은 양의 떡볶이를 외국에서 해먹은 것도 내 식문화적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


지금도 그렇다. 하루만의 첫 식사를 하면서 한국인은 밥심이다, 라고 중얼거렸다. 빵을 사 올 기력도 없고 아침에 비가 오기도 했고 샐러드를 먹자니 생야채가 소화되지 않을 것 같아서 무작정 냉장고의 야채를 털어 끓였다. 야채찜과 치아바타의 합이 좋아서 빵을 사러 나갈까 몇 번이나 고민했지만 피곤해서 그냥 야채찜만 먹었다. 우습게도 쌀은커녕 빵 한 조각 씹지 못했는데 밥심의 중요성을 느꼈다. 먹겠다고 다시 작정을 하니 대충 차리다가도 의욕이 생겨났고 결과물은 냄비 그대로 퍼먹는 밍밍한 야채찜이지만 먹고 나니 더 먹을 힘이 생겼다. 밥심이란 밥을 먹었을 때는 다른 일을 할 힘이 되고 밥을 먹지 않았을 때는 다른 일을 할 수 있도록 먹을 힘을 주는 것인가 보다.


한때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절식을 하면서 많이 아팠고 회복하기까지 정말 오래 걸렸다. 그 이후로 자극적인 음식을 더 못 먹게 되었는데 그때 내가 잃어버린 건 욕망이었다. 밥심을 잃으면 어떤 욕망도 욕구도 스러진다. 그러니 잘 먹고, 잘 자야지. 앞으로도 그래야지. 스스로를 다독였다.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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