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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현 Oct 11. 2022

12-15일 차 : 검은 바위들의 바다

겨울잠,체온,비를 기다리며,결벽,바다새,염려,거인,선생님

12일 차


겨울잠


오늘은 무척 겨울 같은 날이다. 흐리고 바람도 차고 곧 비 소식도 있단다. 그래서인지 그냥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에 눈을 떴지만 그냥 자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잠들어 늦잠을 잤고 느지막이 일어나 더러운 방바닥을 보고도 그냥 뒹굴거렸다. 몸도 무겁고 여러 가지로 피곤했다. 한동안 바쁘게 나를 먹여 살렸으니 게을러져도 괜찮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과외를 앞두고 서점에 가서 문제집을 사 와야 했지만... 귀찮았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냥 귀찮았다. 그래도 아예 외출하지 않는 건 허용할 수 없어서 쓰레기를 비우고 하는 일은 했고 점심, 저녁도 잘 챙겨 먹었다. 내일 비가 온다는데 달리기를 하는 날이라 어쩔까 싶다. 2일 차. 발목도 시큰거리는데 괜찮은 걸까?


누워서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유채꽃들 틈에서, 강렬한 햇빛 아래 혼자 겨울을 살던 앙상한 가지들이 떠올랐다.


오늘은 겨울잠을 자는 날이다. 바쁠 내일을 위해, 겨울 공기를 피해 잘 먹고 푹 자는 그런 날로 치자.




13일 차


체온


어제 종일 쉬고 오늘은 새벽부터 열심히 움직이고자 몸을 일으켰다. 창밖을 보니 해가 뜨기 전이었고 바람이 어마어마하게 부는 게 눈으로도 보였다. 단단히 채비를 하고 운동을 하러 나갔다. 달리기를 하면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고 숨이 차오르면서도 와! 하고 소리를 치고 싶은 고양감이 들었다. 기분이 좋았다. 겨울이다 보니 옷을 어떻게 입고 나가야 할지 매번 고민이 된다. 일단 껴입고 나가는 편이다. 운동을 해서 열이 나면 겉옷을 벗어던지고 싶어 지곤 하지만 체온을 빼앗기면 감기에 걸리거나 몸이 굳어 다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절대 아프거나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이 기분을 계속 느끼고 싶으니까. 그리고 지난번보다 안정적으로 달리는 느낌이 들었다. 계속 기억할 것. 걸음보다 속도가 느려질지라도 중요한 것은 오래 달리는 데 있다는 것. 지구력을 키우고 호흡과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달리기를 하려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조급해할 것도 없고 오직 나만의 싸움이기 때문에 다치지 않고 오래 달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만을 바라게 되었다. 강한 바람도 괜찮다. 내가 대항하려고 하지만 않으면 상쾌할 수 있다.



검은바위들의 바다


운동을 하면서 비가 막 쏟아질 것 같은, 구름에 가려 일출도 볼 수 없는 그런 하늘 아래 바다를 보니 여러 변화가 보였다. 낮게 나는 새라든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 햇빛이라든가, 습기를 머금은 묵직한 바람이라든가, 높아진 수위와 아주 큰 파도소리라든가.


처음 본 그날만큼 바다의 수위가 높았다. 거센 파도는 공격적이고 바람은 세상을 뒤흔든다. 흐린 하늘의 거울인 바다 역시 어둡고 시린 색이다. 매일같이 밟는 여가 반쯤 바다 밑으로 사라진 것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파도에 잠기는 그 길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요즘 수위가 높아 반쯤 드러나 있던 녹지대도 완전히 잠겼다. 검은바위들의 바다가 돌아온 것이다.


문득 우리 때문에 이 이상으로 해수면이 높아지면 여기는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북극의 생명들이 잃어버린 것보다 더 많이, 몇 배로 우리는 값을 치르게 될까? 인간으로서는 슬픈 일이지만 그래야 할 것이다. 물론 전 인류의 눈물로도 오랜 역사의 값을 치를 수는 없겠지만 있는 힘껏 슬퍼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구는 인류에 대해, 변화에 대해 개의치 않을 것이다. 분명히.



비를 기다리며


집으로 돌아와 후들거리는 다리를 풀어주고 휴식을 취하다가 예정대로 집안일을 했다. 미뤘던 옷 정리를 하고 청소도 하고 밥 먹고 다시 누웠다. 솔직히 말해서 침까지 흘리며(?) 낮잠을 자고 나니 내가 너무 게으른가 하는 나쁜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에게 해야 할 일을 부과하고 더 성실한 삶을 요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 눈을 뜨고 내가 오늘 하겠다고 했던 건 달리기, 집안일, 그리고 밀린 일기 쓰기였다. 이렇게 억지로라도 글을 쓰고 있으니 오늘 할 일은 정말 다 한 것이 아닌지? 내가 꼭 바쁘게 살아야 할 일은 없고 빈둥빈둥 지내도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달랬다.


하루 종일 시원하게 비가 내리기를 기다렸는데 끝내 소나기는 오지 않을 것인가 보다. 알게 모르게 조용히 내린 비는 기다렸던 소나기와는 달랐다. 비가 오면 좋겠다. 왜인지 시원하게 내리는 비가, 파도소리만큼이나 큰 소리로 다가오는 장대비가 보고 싶었다.




14일 차


결벽

신기하게도 무거운 몸을 일으키면서 생각했다. 달리고 싶다고. 무리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실행하진 않았지만 어제처럼 오늘도 달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아침을 시작했다. 물론 달리지 않겠다고 생각하니 느지막이 일어나게 되어버렸지만... 변명을 하자면 어제부터 배가 좀 아팠다. 그래도 10시쯤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11시에 문을 여는 빵집에 들렀다 들어올 생각으로 천천히 산책을 시작했다.


날이 춥지 않아서 좋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쌀쌀하더니, 날이 개이기 시작하자 다시 또 따뜻한 햇볕이 지상을 데웠다. 바람도 약한 편이었다. 그래서 옷을 가볍게 입고 나갔는데 마주하게 된 것은 가까운 바다. 물에 잠긴 바윗길.


여기 온지도 꼭 2주째 되는 날이지만 아직까지 바닷물에 발을 들인 적은 없다. 오늘만큼 바다에 가까이 다가간 것도, 예상치 못한 큰 파도에 신발 밑창이 젖은 것도 처음이었다. 바닷물에 손을 담가보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고 젖은 바위를 쓰다듬어 보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다.


이런 데서 나의 조심스러움이 조금 원망스럽다. 별로 깨끗한 편도 아니면서 외부에서 오는 더러움은 잘 참지 못한다. 스스로의 단점이나 문제적으로 느껴지는 부분들을 '꼬인 부분'이라고 부르면서 다른 말로 설명해보려고 애쓰곤 하는데 이런 이상한 결벽은 어떻게 다르게 말하고 생각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바다새


해수면이 높아지니 바다만 가까워진 것이 아니라 이웃들도 가까워졌다. 수많은 새들. 많은 새들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다. 크고 작은 이웃주민들이 바닷물을 따라 해안 가까이로 다가와 있었다. 거친 파도에도 개의치 않고 둥둥 떠다니는 새들을 보니 여기가 우리 동네 파도풀인가 싶기도 했다.


바다에 손발을 살짝 담그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나로서는 바다새들이 더욱 이채로웠다. 정확히는 이방인은 내 쪽이지만...

새들의 사진도 정말 많이 찍었다. 잘 담기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게 새 사진이라는 것을 안다. 해수면이 아무리 높아져도 잠기지 않을 만큼 높이 솟은 자그마한 바위섬을 거처로 삼은 물새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왜 어떤 사람들이 새들에게 마음을 빼앗기는지 알 것도 같다.


"저 새들이 다 죽어버린 후에?" 하며 못마땅해하던 한 소녀가 떠오른다.(『시선으로부터』) 그런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아침이었다.



염려


산책을 하고 돌아오니 날이 더워서 얼른 옷을 벗어던지고 싶었다. 조만간 기온이 떨어진다던데 이 동네 날씨는 많이 오락가락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턱의 통증이 점점 심해져서 곤란해하고 있다. 얼른 전문 치과에 방문해야 하는 걸까. 긴장과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정말로 디스크일지도 모른다. 디스크라면 어쩌지? 몸이 후들거리는 저녁이 반복되어서 나는 저혈당이나 그런 병들을 걱정하기도 했었다. 어제도 오늘도 두통이 심하기도 했다.

별 일이 아니면 좋겠다. 나는 아픈 것이 두렵다. 어떤... 시작되려는 나의 삶을 잃고 싶지 않다.




15일 차


거인


나를 가장 괴롭게 했던 건 그 무엇도 아닌 불면증이었다. 잠들지 못하는 것만이 불면증이 아니라 자꾸 깨고 선잠밖에 잘 수 없는 것도 불면증이다. 언제 잠이 들어도 항상 같은 시간에 눈을 뜨고 새벽에 홀로 깨어 어둠 속에서 뒤척이다가 겨우 선잠에 들지만 한두 시간 후 다시 눈을 뜨곤 했다. 몸은 너무 피곤한데 잠들 수가 없어서 아침에 침대에 누워 멍한 정신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찾아오지 않는 평안을 기다렸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선잠에 들면 악몽을 꿨다. 엄청나게 무섭거나 잔인한 꿈이 아니지만 무언가에 쫓기고,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모든 일이 엉망이 되는 그런 꿈들. 악몽이라고 지칭하기가 애매하지만 나의 정신적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던 그런 꿈들은 내 상태와 정확히 일치했다. 나는 애매하게 아팠고 어떻게든 그걸 다 견디고 있어서 누구도 내가 지친 줄 몰랐다. 새벽은 너무 외로웠다. 아무도 내가 아픈 줄 모르는 세계가 매일 새벽 나를 깨웠다.

최근에는 수면유도제 복용을 중단했고 오래 잠들 수 있게 해주는 약을 감량하고 있는데, 쉽지가 않다. 하지만 분명 수면의 질이 좋아지고 있었기에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다시 예전처럼 새벽 3시에 눈을 떴다. 아 또, 하는 약간의 짜증이 밀려왔다. 곧 바람 소리에 놀라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하긴 했지만 5시에 다시 눈을 떴다.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어둠 속에서도 창밖의 나무가 마치 머리채처럼 흔들리는 게 보였다. 덜컹이는 창, 찌꺽이며 흔들리는 문, 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휘이이잉 철썩, 파도와 뒤섞인 그 바람 소리.


불면증과 악몽, 피로감, 그리고 두려움. 나는 그 모든 것을 또 나의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그 순간에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이야기였던 것이다. 밖에 커다란 몸집의 외눈박이 거인이 돌아다니고 있는 게 아닐까? 폭풍에 휩쓸리면 만날 수 있다는 제주 바다의 외눈박이 거인.


스스로가 유령 같았다.

그런 방식으로 나는 그 새벽을 견뎠다. 그리고 몸을 일으킬 수 없다는 무력감이 아니라 날씨 탓에 몸을 움직이러 나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아쉬움을 더 크게 느꼈다. 안심이 되었다. 잠들지 못하는 새벽이 또 찾아와도 나는 예전과 다르고 떨쳐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동 틀 무렵이 되자 어둡던 하늘이 어슴푸레한 옅은 색으로 바래진다. 창밖으로 밝은 별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밝고 컸다. 별이다! 별이 맞나? 도시 출신이라 그런지 별빛을 의심하며 반기는 모순된 감상이 나왔다. 별지도를 들여다보며 하늘을 보다가 준비운동을 시작했다. 어느 순간 희고 푸른 아침이 오고 있었다.



선생님


결국 강풍에도 지지 않고 달리러 나갔다. 법환마을은 제주 본토의 최남단이라 태풍이 오면 가장 먼저 직격탄을 맞는 동네라던데, 여름이 아닌 계절에도 폭풍 같은 바람이 자주 찾아오는 모양이다. 돌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달리기를 하려고 섰을 때 정말 날아갈 것 같았다. 기분이 아니라 몸이. 바람에 떠밀리고 흔들려서 중심을 잡고 자세를 잡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달리고 싶어서 달렸다. 하고 싶다는 생각은 소중하기 때문에 나는 무시하지 않기로 했다.


런데이 어플에서 "바람을 느껴보세요!"하고 응원하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 엄청나게 날카로운 바람 속으로 뛰어들고 있던 터라 나도 모르게 "너무 추워요, 선생님!" 하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이른 아침이라 사람이 없길 망정이지 좀 창피했다. 소심하고 목소리 작은 내가 목청 높여 누구인지 모를 선생님을 갑자기 찾게 만드는 바람이라니. 내 외침에 내가 우스워서 한기에 덜덜 떨면서도 웃었다.

왜 선생님일까 하는 의문도 든다. 아마 나에게 선생님은 일종의 신과 같을 것이다. 나는 늘 선생님과 같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고 내 안의 선생님은 항상 나를 사랑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달리면서 선생님에게 호소하고 있자니 그 누구인지 모를 선생님이 멀고 먼 초월자에서 내 곁에 있는 누군가처럼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찬 바람에 턱관절이 아려왔지만 역시 달리길 잘했다. 달릴 때면 아무 생각이 들지 않고 주변의 풍경과 바람, 몸의 움직임, 내 숨소리만 가득한 그런 순간이 온다. 그렇게 오직 나만이 존재하는 듯한 순간을 거쳐 목표를 달성했을 때의 성취감도 크다.

지금도 광폭한 바람이 내 하루를 뒤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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