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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현 Oct 11. 2022

4-7일 차 : 바다 아래 녹지대

규모에 맞는 삶,바람과 몸,덜 유해한,물건들,땅끝의 여,귤맛,숭고

4일 차


규모에 맞는 삶


나는 늘 가까운 학교를 다니고 싶어 했다. 초등학교는 비교적 가까웠지만 집 바로 앞이 학교인 친구들이 부러웠고 중학교는 걸어서 20분이 걸렸다. 그래서 엄마가 새 집 5분 거리에 고등학교가 있다고 했을 때 무척 기뻤다. 편하게 학교에 다니는 꿈에 부풀었었다. 하지만 웬 걸, 그 학교는 남고였고 나는 또 20분은 족히 걸어야 하는 거리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근처 여고에 배정되었다면 더 멀었을 것이다. 근처에 대형마트가 있어 좋다는 말이 뚜벅이를 고려하지 않은 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배신감은 그때와 비슷했고, 동네 마트에 가려고 하니 그조차 15분은 걸어야 하는 곳에 있어서 배신감이 배가 되었다. 그래도 믿고 찾아간 동네 마트가 정말 '동네' 마트라는 말처럼 작아서 고작 과자 하나만 덜렁 사들고 나올 수밖에 없었을 때의 그 배신감이란. 반복되는 배신감에 편한 장보기는 글렀구나, 싶었다.

동네 강아지 친구가 집 앞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나 헤매듯 낯선 골목을 지나 해안가로 돌아가는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친구들 덕에 배신감이 옅어졌다. 얼굴이 비슷비슷한 커다란 개들이 꽤 많았고 자유롭게 나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무서워하거나 경계하지 않았고 위협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반가워하거나 시큰둥하게 지나쳤다. 인도와 차도가 불명확하게 구분되어 있거나 지나치게 좁은 골목골목은 복잡하게 얽혀 있기도 해서 초행길에 잘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만큼 차도 쉽게 돌아다닐 수 없는 길이다 보니 사람은 좀 불편해도 커다란 개들은 편하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좁고 복잡한 길도, 다소 먼 마트들도 그러려니 싶어졌다. 아주 작은 마트조차 이 마을에는 어울리는 듯했다. 약간 부족하고 불편해도 여긴 또 여기만의 규모에 맞는 삶의 방식이 있다. 내가 적응하면 될 일이다.



바다 아래 녹지대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하고 저녁엔 멀리 마트까지 다녀오게 된 건 우연이었다. 아직도 등과 어깨가 찌뿌둥해서 아침에 쉬려고 했었는데 창밖에 남다른 빛무리가 보이는 바람에 나갈 수밖에 없었다. 막상 나가보니 역시 좋기도 해서 정처 없이 걷고 또 걸었다.


신기한 건 어제까지 몰아치던 파도가 잦아들었고, 멀어진 파도 소리와 달리 바람은 더 세졌고, 바다였던 곳이 바닥을 드러내며 검은 바윗길이 되었고, 갑자기 신비로운 녹빛으로 뒤덮인 바위들이 눈에 들어왔다는 점이다. 그때까지는 갑자기 저 녹빛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눈치 채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했었다. 감탄하면서도 바보처럼 몰랐다. 그러다 저녁 산책을 나섰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침에 내 감각을 사로잡았던 모든 것들이 사실 이어져 있다는 것을, 변화였다는 것을.



당연하게도 밀물과 썰물 때문이었다. 썰물 때라 바다와 나의 거리가 멀어졌기에, 검은 바위로 이루어진 경계지대가 넓어졌기에 바람의 세기와 무관하게 파도 소리는 아득해졌던 것이다. 그렇게 드러난 검은 바위를 물들인 녹빛의 생태계. 이끼 낀 바위들은 이때껏 본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풍경을 보여주었다. 바위틈에 고인 물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같은 곳을 거닐었는데도 매일매일이 새롭다.




5일 차


바람과 몸


섬에서 하고 싶었던 일 중에 운동이 있었다. 그냥 운동도 아니고 달리기를 하고 싶었다. 요즘은 좋은 어플이 많으니까, 어디서든 혼자 뛸 수 있도록 이 해안에서 초보 주자가 되어서 돌아가야지 하는 포부를 가지고 내려왔다. 하지만 달리기를 시작하자니 이 몸으로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서 체력단련 삼아 걷기 운동을 먼저 하기로 했다. 그것도 달리기와 마찬가지로 무리가 될까봐 격일로 진행하고 있어서 하루는 편안하게 산보를 하고 하루는 인터벌 걷기를 하기로 했다. 오늘은 각 잡고 걷는 날. 발목도 무릎도 좋지 않기 때문에 무겁고 굳어있는 몸을 잘 풀어줄 필요가 있다. 새벽에 눈 뜨자마자 명상 겸 스트레칭 겸 요가를 하고 해 뜨기 전에 출발했더니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운동이 끝났다.


해안을 오른쪽으로 끼고 걸을 때는 시원했는데 해안을 왼쪽으로 끼고 걸을 때는 바람을 정면으로 맞아 두 뺨이 얼얼했다. 아직 겨울이니까 차갑고 거친 바람이 분다. 바람으로 유명한 이 섬에서도 가장 바람이 많이 부는 동네로 손 꼽히는 곳이 이 법환마을이라고 한다. 바람에 몸이 휘청이기까지 했다.


바람을 헤치며 걸어가는데 양 다리 각각에 들어가는 힘이 달라지는 그 감각이 신기했다. 바람에 기울어지는 몸을 세우려니 어쩔 수 없이 비대칭이 되는 좌우 균형, 그 비대칭의 힘으로 바르게 선 나의 몸. 그렇게 바람으로부터 몸 쓰는 법을 배웠다. 몸이 좀 나아지면 본격적으로 달리기를 해봐야지, 이 바람을 가르며 달리고 또 달려야지. 그런 생각을 하니 휘청이는 걸음이 즐거웠다.



덜 유해한


낮에는 미리 알아두었던 비건 빵집에 들렀다. 이 섬에 오기 전에 스스로에게 다짐했었다. 이 섬과 마을을 단순 관광지로 소비하지 말 것. 모든 것을 지나치는 풍경으로 흘려보내지만 말고 관심을 갖고 대하며 가능하다면 이 곳에 너무 많은 흔적을 남기지 않을 것.


사람이 살아가면서 무언가를 해치거나 소비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줄일 수는 있다. 완전한 비건주의를 실천하긴 어렵지만 외식하지 않고 육식을 줄이고 유제품을 소비하지 않기로 했다. 장을 필요한 만큼만 봐와서 멀쩡한 음식을 버리는 일도 없게끔 노력하기로 했다. 그런 식생활의 변화를 위해 미리 비건 빵집을 지도에 표시해두었다. 유제품이 들어가지 않은 식사빵과 야채찜의 조합은 1인 가구가 해먹기에 손색 없는 간단한 밥상이기 때문이다. 빵집에서 올리브 치아바타와 녹차식빵을 샀다. 모두 유제품이 들어가지 않은 빵이었다. 약간 뻣뻣해보이지만 살짝 데워서 양배추찜이랑 함께 먹으면 거친 식감을 싫어하는 나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도록 촉촉하게 먹을 수 있다.



비닐봉지를 최대한 쓰지 않기 위해서 얼마 되지 않는 음식물 쓰레기는 플라스틱 용기에 담아서 매일매일 버리고 그렇게 재활용한 플라스틱 용기는 깨끗하게 씻어서 분리수거 한다. 빵집에서는 빵을 얇은 종이 봉투에 담아주는데 그 종이 봉투는 일반 쓰레기나 종이를 모으는 용도로 쓰고 있다. 아무래도 쓰레기가 적게 나오고 직접 종량제 봉투에 쓰레기를 모으지 않고 바깥 분리수거장에 있는 큰 종량제 봉투에 일반 쓰레기를 버려야 하기 때문에 쓰레기를 담아갈 봉투로 비닐봉지를 쓸 수밖에 없나 고민을 했었는데, 이렇게 큰 쓰레기들에 작은 쓰레기를 차곡차곡 담아 버리니 걱정을 덜었다. 과자봉지나 두부 포장 용기 같은 것들을 각종 쓰레기 담는 용도로 재활용하니 바로바로 쓰레기 버리기도 좋고 아주 편하다.


물을 계속 사먹어야 하면 그 플라스틱을 다 어떻게 하나 싶었는데 다행히도 사무실에 정수기가 따로 있었다. 텀블러에 물을 잔뜩 받아다가 요리할 때도 쓰고 음수로도 쓰고 하니 문제가 해결되었다. 또 정기적으로 빨래할 거리가 속옷이나 양말 외엔 거의 없어서 커다란 세탁기를 사용하는 것도, 세제를 잔뜩 쓰는 것도 낭비 같아 세탁 비누를 샀다. 정확히 재료가 뭔지는 모르겠는데 친환경 재활용 세탁 비누...? 같은 것이 있었다. 물을 받아서 손 빨래를 하니 나름 괜찮은 듯하다. 조금 귀찮지만 몸이 고생하면 자원을 아낄 수 있으니 좋은 일이다.


나는 무해하지 않다. 하지만 조금 덜 유해한 사람이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이 섬의 생태계와 풍경을 대하기로 다시 한 번 다짐한다.




6일 차


물건들

나는 누군가의 마음이 담긴 물건이 나를 지켜준다고 믿는다. 겁이 많았던 소녀는 열쇠고리 같은 것을 좋아했다. 특히 빛이 나거나 소리가 나는 것들을 좋아했는데 그렇게 물건의 존재감이 강할수록 스스로를 더 잘 지켜줄 거라고 믿었던 모양이다. 야광 팔찌를 좋아했고 측면의 버튼을 누르면 야광 불이 들어오는 시계를 보물처럼 아꼈다. 언니와 싸워서 어두운 복도에서 벌을 서곤 했을 때 그 시계의 불을 끊임없이 켰다 껐다 하면서 어둠 속에서 킬킬 웃곤 했다.

지금도 나는 물건의 존재감을 믿는다. 장신구를 좋아하지만 잘 바꾸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엄마와 친구들, 언니, 그리고 내가 마음을 담아 고른 물건, 손때 묻은 물건들은 나를 지켜주고 외롭지 않게 한다. 마음이 담긴 사물에는 분명 공간을 집과 같은 장소로 영토화하는 능력이 있다.

엘리베이터를 혼자 타는 것도, 모르는 사람과 함께 타는 것도 너무 너무 무서워했던 사춘기 소녀는 처음 생긴 슬라이드폰을 밀어 올리고 내리고 반복하면서 엘리베이터가 11층을 향해 가는 그 몇 초의 긴장되는 시간을 버텼다. 그 시절로부터 한참 지난 지금도 나는 소중한 사람들이 선물해준 물건이나 스스로 의미 있게 여기는 물건을 만지작 거리며 혼자라는 생각을 떨쳐낸다. 마음이 담기면 모두 다 내겐 부적이다.



땅끝의 여


내가 또 좋아하는 것, 바로 경계지대다. 늘 경계를 꿈꿔왔다.

땅끝마을 해남에 매혹되었듯 지금은 이 섬의 최남단에서 먼바다로 가는 길을 찾고 있다. 하지만 사실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기 때문에 나는 땅끝을 사랑한다. 이 섬에 온 이유도 그런 것이긴 했지만 섬의 최남단인 이 해안에 머무르게 된 건 우연이었다.

그리고 이 해안에는 밀물 때면 바다가 되고 썰물 때면 길이 되는 바윗길이 길게 뻗은 '배염줄이'라는 곳이 있다. 제주 방언으로 '여'는 수중 암초나 곶처럼 바다로 돌출된 땅을 이른다. 바다였다가 길이었다가 하는 바위들 위를 걷거나 반쯤 물에 잠긴 여를 쉼 없이 핥듯이 넘실대는 파도를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바닷속으로 사라질 수 있을 것 같다. 밀물 때 밀려오는 파도 속으로 사라졌다가 썰물 때가 되면 다시 수면 위로 드러난 길을 따라 돌아오면 되지 않을까. 바닷속으로 향하는 길은 그 어떤 경계보다도 강한 인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이렇게 우연도 나를 땅끝으로, 바다의 시작으로 이끌었다. 아마도 이 여행이 도망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도록 하라는 바다의 뜻이 아니었을까.

너는 바다로 갈 수 있다고. 바다는 너를 환영한다고. 하지만 언젠간 반드시 발길을 돌려 땅으로 돌아가라고, 수평선에 묻혀 종종 잊히기도 하는, 이 섬의 끝에서.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위태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는 것이
땅끝은 늘 젖어 있다는 것이
그걸 보려고
또 몇 번은 여기에 이르리라는 것이"
(나희덕, 땅끝 부분)




7일 차


귤맛


내가 머물고 있는 펜션도 그렇고 주변 펜션의 사장님들 대부분이 농장을 겸업하는지 귤 무인판매대가 흔히 보인다. 그냥 귤 말고 한라봉이나 천혜향이 섞여있기도 하고, 아예 한라봉만 내놓기도 한다. 혼자 살다 보니 많이 먹지는 못해서 썩히게 될까 봐 적당한 양에 한 봉지 천원인 곳에서 나도 한 봉 집어왔는데, 도시 물가와 비교하니 역시 귤의 섬이구나 싶다. 바위틈 유채꽃, 그 앞에 귤 봉지를 흔들었다. 노랑, 주홍. 밝은 빛깔이 눈앞에 아른거리니 마음에 들었다.



그러고 보니 비거니즘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꿀을 벌의 몫으로 남겨두고자 하기에 '꿀맛'이라는 유행어 대신 '귤맛'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던데, 새삼 귤이라는 글자도 귤 자체도 귀엽게 느껴진다.


※ 제주 생활 정보 : 귤 한 봉지 살 수 있는 현금 1-3천 원 꼭 가슴에 품고 다니기. 마트에서 귤 사면 바보!



숭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나 자신을 먹여 살리는 일과 그것을 위해 돈을 버는 일은 매우 숭고한 일이라고. 이상적이고 현실감각이 다소 떨어지던 나에게 기본적인 욕구를 채우고 경제활동을 하는 일은 어쩐지 세속적이고 하찮게 느껴졌던 때가 있었는데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로 삶을 이어가기 위한 가장 기초적이고 원초적인 일들이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도망치고 싶을 때마다 그 숭고함을 되새겼다. 나는 더 큰 일을, 의미 있는 일을 할 수도 있는 소중한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나라는 존재를 지켜내는 일을 하고 있다고. 어떻게든 살아내는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며 가장 위대한 일이라고.


혼자 살게 된 지 일주일. 그 숭고한 일의 절반 이상 내 손에 달린 나날을 보내면서 나름 순조롭게 나를 먹여 살리고 있다. 그리고 낭비 없이 냉장고를 잘 비워나가고 있다. 비록 표고버섯이 너무 많아서 다 먹지 못하고 반쯤 버리게 되는 불상사가 일어나긴 했지만 다시는 그런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오늘따라 잔뜩 흐린 하늘과 더불어 질린 안색이 된 바다를 보며 사과했다.


선물 받았던 크렘드마롱 밤잼. 비건 잼이기도 하다. 잘 먹고 있어요, 고마워요. 나중에 연락해서 꼭 잘 먹었다고 말해드려야지.


냉동식품에서 벗어나니 여러 가지로 품이 들긴 한다. 가장 큰 일은 이틀에 한 번 꼴로 빵 한 조각이라도 사러 15분 이상 걸어 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오늘도 빵집에 들러 치아바타와 스콘을 샀고, 나간 김에 예기치 않게 20분 거리의 동네 마트까지 들렀다. 둘이 방향도 반대인데 왜 마트까지 갈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신중하고 겁이 많은 편인데 이곳에 오자마자 여러 번 충동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 그게 나쁘지 않아서 또 새롭다.


마트에는 생활용품과 애호박을 사러 갔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묶어서 반값에 파는 과자를 한 아름, 오징어채 한 봉지를 들고 있더라. 그것만 만원이었다. 간식거리를 줄여야 알뜰한 숭고(?)를 이룰 수 있으리니, 비닐 소비도 줄일 수 있으리니. 그런 의미로 이거 다 먹을 때까지 당분간 간식거리 구매를 금지하겠다고 다짐했는데 지켜질지 모르겠다. 원래 과자를 거의 먹지 않는 편인데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특별히 바쁘지 않으니 먹는 게 일이라서 입이 자꾸 심심한 것 같다.


그리고 내일은 오래간만에 들어온 일을 해야겠다. 먹는 것만큼 버는 것도 아주 숭고한 일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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