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도를 벗어난 용기있는 여정
예민한 모범생
20년간 기획자로 일했다. 트렌드를 예측하고 시장의 잠재고객의 마음을 읽어내 새로운 서비스나 상품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회사에서는 협업 부서의 생각을 이끌고 조율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했다. 모든 일이 타인의 생각을 섬세하게 다루는 업무였다.
돌이켜보면 나는 어린 시절 예민한 편이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어릴 적 아토피에 시달린 탓인지 작은 자극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 같다. 삼 형제 중 둘째답게 눈치도 빠른 편이었다. 경쟁에서 지지 않으려 애썼고, 주변의 기대에 먼저 부응하려고 노력했던 아이였다. 피곤한 어린 시절이었다.
중학교 때는 마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엄석대’와 닮아 있었다. 어른들에게는 모범생으로 보였을 테고, 또래들에게는 답답한 범생이로 여겨졌을 것이다. 덕분에 경쟁이 치열해지던 외고에 입학할 수 있었고, 여느 학생들처럼 치열한 학교 생활을 해왔다. 고3 때까지는 그렇게 정해진 궤도를 빠르게 달리는 뻔한 범생류였다.
범생탈출, 인생전환점
학력고사 끝자락 세대였던 나는 고3이 되어서야, 가고 싶은 대학과 전공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학시험은 ‘선지원 후시험’ 제도라서 대학과 전공을 먼저 선택한 후, 지원한 수험생들끼리 경쟁을 치르던 때였다. 평소 모의고사 점수와 내신성적으로 가지고 갈 수 있는 학교와 전공을 저울질하던 시기에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거지?’
국어보다 수학을 잘했다는 이유로 ‘이과’를 선택했던 내가 고3이 되어서야, 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일을 좋아하는지에 대해서 처음으로 고민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국영수 점수를 높이는 데에만 집중했던 나였는데, 타인의 시선이 아닌, 온전히 내 관점으로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눈앞에 마주하게 되었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해도 쉽게 답이 찾아지지 않았다. 내 점수에 맞춰 갈 수 있는 몇몇 후보군들이 있었지만, 이미 나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맞는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고민이 이어지던 고3 여름방학 때였다. 우연히 TV ‘다큐멘터리’ 프로를 보다가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생소했던 ’ 컴퓨터그래픽‘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미국의 애니메이션 회사인 Pixar가 설립된 지 얼마 안 되었던 때였고, 스탠드형 조명등이 공을 가지고 노는 애니메이션을 소개하는 장면이었다. 컴퓨터를 활용해 세상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디자인'이라는 것이 바로 내가 하고 싶었던 '그것'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아직도 그 장면을 보며 두근거렸던 심장소리가 생생히 기억난다.
어릴 적 그림을 제법 잘 그리고, 손재주가 있었지만, 미술대학 진학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디자인 과가 있다는 것도 다큐멘터리를 본 이후에 처음 알게 되었다. 내 주변에는 미술을 전공한 사람도 없었고, 다니던 학교에서도 미대에 진학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동아리 미술반조차 들어가 본 적이 없던 터라, 미대입시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대입시험은 이제 반년도 채 남지 않은 시기였다.
하지만 뛰는 심장은 가라앉지 않았고, 이때부터 나는 미대입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미대를 진학하기 위해서는 실기시험을 봐야 한다는 사실과 ‘댓생’과 ‘구성’이라는 두 가지 시험이 있다는 것, 게다가 미대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보통 고1 때부터 실기준비를 시작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했다. 나는 재수를 결심했다.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은 우선 그 해 대학에 합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재수를 선택할 계획이었다. 모의고사 점수와 내신 성적에 맞춰 안정적으로 갈 수 있는 학교를 정하고, 합격 후 바로 휴학할 생각이었다. 혹시라도 재수, 삼수를 했는데도 미대 입학에 실패했을 때를 대비하여, 신중하게 학과도 선택했다. 그리고 학력고사 기간까지 남은 4개월을 무조건 합격할 수 있도록 공부에 집중했다.
수학 시험이 유난히 어려웠던 해였는데, 다행히 지원한 학과에 합격할 수 있었다. 나는 입학과 동시에 곧바로 휴학을 하고, 미대 입시 준비에 돌입했다. 재수생활은 내 인생 처음으로 정해진 궤도를 벗어난 기간이었다. 하고 싶은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목표를 위해 도전하는 일이 가슴 뛰는 일이라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미대입시를 준비하는 10개월이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남들이 2~3년 이상 준비하는 과정을 빠르게 따라갈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이 나 스스로 결정한 ‘하고 싶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오전에 입시 종합학원을, 오후부터 밤늦게까지 미술학원에서 남들 이상으로 그림을 그리며, 치열하게 준비했고, 그 덕분에 원하는 디자인과에 합격할 수 있었다. 남들의 기대에 부응하며 살았던 내가 처음으로 나 스스로 원하는 것을 결정하고 성취했다는 것이 너무 뿌듯했다. 이 경험은 내 인생을 180도 바꾸는 전환점이었고, 나침반이 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내 가슴이 뛰는 일을 선택하는데 망설이지 않았다.
가슴 뛰는 일을 찾아서
나를 찾아가는 첫 단추를 끼우게 되자, 모든 결정의 기준은 ‘이것이 진짜 내가 원하는 일인가?’에 답하기 시작했다. 원하는 일을 모두 이룰 수 없지만, 도전하지 않아서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좋은 선택보다, 나다운 결정을 하려고 노력했다. 커리어 기간 동안 업종과 분야를 다양하게 도전하며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도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이 내겐 흥미롭다. 과거의 성공적인 답안지를 참고하기보다는 늘 새로운 방식의 답을 찾고 싶어 했고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고 했다.
잘 다니던 대학원을 뛰쳐나와 벤처창업을 준비하던 20대 시절도, 게임회사 리더 자리를 그만두고 대기업의 말단부터 다시 시작했던 30대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40대 중반에 생소했던 부동산 분야 스타트업에 뛰어든 것도 가슴 뛰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분야든 6개월이면 그 시스템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 안에 내 강점을 살릴 수 있는 일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가족들은 늘 나의 선택에 불안해하고, 주변사람들은 늘 내가 또 어떤 새로운 선택을 할 것인지 궁금해했다. 나의 정체성은 무엇(what)을 하느냐에 있지 않고, 왜(why) 그것을 하느냐에 항상 있었다. 남은 10,000일의 인생도 가슴이 반응하는 도전을 하고 싶고, 그것을 찾기 위해 어렵게 안식년의 긴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었다.
미래의 나도 그 연장선상에 서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남들의 시선으로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멋있게 사는 인생을 만들어갈 것이다. 궤도를 벗어나는 것이 일탈이 아닌, 내 지도를 내가 그려간다는 생각으로 시도해 볼 것이다. 그게 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