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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Oct 14. 2018

경험이 없어도 괜찮아요

THE BIG ISSUE KOREA 188



"Students wanted. No experience needed."


다음 주에 있을 회의를 준비하다가 우연히 이 광고와 마주쳤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장씩 보게 되는 인쇄 광고 속에서 유독 눈에 띄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입맛을 돋우는 비주얼 때문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감자튀김이 있어야 할 자리에 햄버거를, 아이스크림이 있어야 할 자리에 감자튀김을, 그리고 햄버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아이스크림을 담은 맥도날드의 엉뚱한 광고는 이렇게 말하고 있거든요. "경험이 없어도 좋다. 일에 대한 열정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요.



McDonald's McMistakes Campaign (출처 adsoftheworld.com)



벌써 두 달 전 일이네요. 팀에 새로운 인턴들이 배정되었어요. 대부분 대학생이거나 갓 졸업한 어린 친구들이었는데, 한 달간 회사 생활을 해본 후 최종 과제 발표까지 마쳐야 합격 여부가 정해진다고 하더군요. 경쟁 끝에 또다시 경쟁이라니. 긴장을 풀기도 전에 다시 시험대에 오른 것이죠. 지금껏 쌓아온 것이 남들보다 부족한 건 아닌지, 매 순간 내가 잘하고 있는지 걱정하는 모습을 보니 문득 그 나이 때의 제가 떠올랐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순탄치 않은 날들이었죠.


"글 쓰는 사람과 그림 그리는 사람의 머리는 달라요."


이미 몇 번의 실패를 경험한 후 다시 용기를 내 지원한 인턴 자리였는데, 제 이력서에 적힌 '시각디자인' 전공을 보고는 한 면접관이 건넨 말이었습니다. 멀쩡히 디자인과 나와서 왜 카피라이터가 되려 하느냐고, 아트 디렉터의 길이 훨씬 수월할 텐데 뭐 하러 먼 길을 돌아가느냐고. 그 순간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던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어요. 카피라이터로 지원한 저로선 납득할 수 없는 말이었으니까요. 비록 전공은 다를지라도 글 쓰는 일이라면 누구보다 애착을 갖고 임할 수 있다고 자부했는데, 그의 눈에 비친 저는 그저 그림을 그리고 디자인을 할 줄 아는 미대생일 뿐이었죠. 어떤 대답을 해야 하나 망설이던 그때, 또 다른 질문이 날아들었습니다. 제 포트폴리오를 펼쳐보기도 전이었어요. 다른 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한 경험은 없냐고, 그게 있어야 확신할 수 있을 것 같다고요.


나쁜 예감은 결코 우리를 비껴가는 법이 없죠. 원치 않는 결과에 며칠을 끙끙 앓아야 했어요. 꿈을 생각하면 다시 대학교로 돌아가 글공부를 시작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20대 중반인 제 나이를 생각하면 어떻게든 전공을 살려 취업해야 하나 싶었어요. 차곡차곡 쌓아온 내 과거가 전부 오답처럼 느껴지고, 앞날에 도움은커녕 걸림돌이 되는 건 아닐까 답답했습니다. 하지만 카피라이터가 된 지금, 그때를 돌아보면 탈락한 게 오히려 다행이다 싶어요. 합격했다면 어땠을까, 상상하면 아찔합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선배 밑에서 얼마나 끙끙댔을지 알 수 없으니까요.


이쯤 되면 궁금해지시겠죠. 어떻게 카피라이터가 될 수 있었는지. 면접 자리에서 오간 모든 말이 합격 혹은 불합격의 원인이라 확신하던 시기에 그 날카로운 말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기란 어려운 일이었어요.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었죠. 어떻게든 그 말을 뒤집어줄 다른 말이 필요했어요. 결국 멘토링을 해준 선배님에게 조심스레 조언을 구했습니다. 회사에서 '부장님'이라 불리는 선배님은 광고업계에 오래 몸담고 있었고, 무엇보다 제 전공을 확인하기 전에 제 글을 먼저 읽어준 분이었죠. 면접에 대한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그분은 이렇게 말했어요.


"이미 충분한 경험을 했다면 인턴이 아니지. 나도 네가 카피를 얼마나 잘 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과정을 즐겁게 여길 사람이라는 건 확신해. 인턴은 그런 사람을 뽑는 자리야. 다시 용기를 내봐도 괜찮아."


카피라이터가 된 지금도 가끔씩 생각합니다. 인턴이나 신입사원을 뽑는 자리에도 경력자가 오길 바라는 아이러니한 세상에서 저처럼 상처받고 자책하고 좌절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하고요. '부장 인턴', '중고 신입'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는 세상이 저는 안타까워요. 처음인 게 당연한 자리조차 경험 없이는 감히 도전하지도 못할 꿈같은 자리가 되어버렸으니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의 저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누군가가 있다면 힘을 실어 말하고 싶습니다. 꼭 한 번 해보고 싶고 도전해보고 싶은 일이 우리 인생에 몇 번이나 찾아와줄까요? 그건 흔한 일이 아니에요. 무모하리만큼 좇아봐도 괜찮아요. 어떤 걸 이뤄낼지 그 누구도, 어쩌면 나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답니다. 무모함만으로 달려온 저는, 그림 그리는 사람의 머리와 글 쓰는 사람의 머리는 결코 다르지 않다고 믿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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