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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Mar 20. 2019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THE BIG ISSUE KOREA 198



얼마 전,  글쓰기 모임의 담당자분과 인사를 나누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제 글을 읽어본 적이 있다는 말에 조금 긴장한 채로 나갔지요.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눴을까요. 어색한 공기가 조금 사라질 무렵, 그분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실제로 뵈니까 쓰신 글과 분위기가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순간 칭찬일까 아닐까 고민했습니다. 좋은 뜻에서 한 말이겠지만, 벌써 세 번째 듣는 이야기라 잠깐 생각에 잠기게 되었어요. 어떤 쪽이 진짜 제 모습에 가까운지는 알 수 없어도 평소의 저와 글 쓰는 저는 어딘가 다른 구석이 있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았습니다. 독자 대부분이 저를 모르는 분들이실 거란 생각 때문인지도 몰라요. 제 이름을 밝히고 쓰는 글과 숨기고 쓰는 글의 차이도 꽤 큽니다. 후자의 경우, 더 대담하게 써 내려가기도 합니다. 차분한 인상과는 어울리지 않을 거라 지레 판단하고 자체 검열해버리는 문장도 과감히 싣기도 해요. 그럴 때면 나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드는데, 비슷한 느낌을 받는 순간이 또 있습니다. 바로, 낯선 여행지에 도착했을 때지요.


태어나 단 한 번도 혼자 여행을 떠나본 적 없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별 탈 없이 잘 다녀올 거라는 막연한 확신이 있습니다. 누구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오리라는 생각도 듭니다. 평소엔 꿈도 꾸지 못한 일을 여행지에 왔다는 이유로 과감히 도전해보고 싶어질 때가 많아요. 그 순간이 되면 한 시간 단위로 해야 할 일을 체크하던 손 대리는 온데간데 없습니다. 계획한 것들이 틀어지면 식은땀을 줄줄 흘리던 제 모습도 완전히 사라져 버려요. 여행지에선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도 나름의 즐거움이 있는 것 같거든요. 어떤 땐, 구글 지도 보는 것조차 번거로워 무작정 걸어보는 쪽을 택하기도 합니다. 두 갈래 길이 나오면 더 마음에 드는 가게가 있는 쪽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정해둔 곳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순간 가장 머물고 싶은 곳을 택하는 거지요. 어쩌면 일상에선 절대 해보지 못할 일이란 걸 알기에 조금 더 과감해지는 건지도 몰라요. 매일 똑같이 흘러가는 일상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 대부분의 여행은 그 생각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일 테니까요.



'Sedventure Campaign' <출처: www.adsoftheworld.com>



"TRAVEL FAR ENOUGH YOU'LL MEET YOURSELF."


가장 최근에 다녀온 홍콩에서의 내 모습은 어땠을까. 일상에서의 내 모습과 얼마나 달랐을까. 이 광고물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이었답니다. 한 컷의 이미지로 만들어본다면 생애 처음으로 물속에서 행복해하는 제 모습이 담기지 않을까 싶네요. 물에 뜨지도 못하는 제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홍콩에서만큼은 밤마다 수영장을 찾았거든요. 수영복이 없던 제게 친구는 선뜻 여분의 수영복을 빌려주었어요. 그날 저는 왜 밤 수영에 꽂혀버렸는지 친구는 왜 수영복을 두 벌이나 챙겨 왔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순간의 기억은 제게 꽤 짙게 남아있습니다. 닿지 않는 발을 동동 구르며 가만히 야경을 바라본다는 건 생각보다 참 행복한 일이었거든요. 이 즐거움을 서른이 넘어서야 알게 되다니 괜히 억울한 기분이 들기도 했어요. 서울에 봄이 찾아온다면 수영을 한번 배워볼까 합니다. 그동안 생존을 위해 언젠가는 배워둬야 했던 게 수영이라면, 이젠 여행을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이 수영일 것 같습니다.


미팅을 마치고 함께 카페를 나서는 길, 우리는 횡단보도를 앞에 두고 함께 인사를 나눴습니다. 담당자분은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이렇게 말했어요.


"오늘 저한테 보여주셨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시면 더 좋을 것 같아요. 글에서 만나지 못한 새로운 모습을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거든요."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왠지 모르게 용기가 생겼습니다. 글 속에서 느껴지는 제 모습과 실제 제 모습이 같아야 한다는 강박증을 내내 갖고 있었거든요. 사실, 그래야만 하는 모습 같은 것도 그러면 안 되는 모습 같은 것도 없는데 말이에요. 결국,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니까' 하는 생각이 스스로를 자주 주춤하게 만들었던 것 같네요. 일상에서나, 여행에서나, 어디서나요. 하지만 이제는 그 생각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내가 생각한 모습 속에만 갇혀 사는 게 가장 후회로 남을 일일지도 모르겠다고요.


내년 여름엔 바다를 유유히 헤엄치는 제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너무 이른 꿈이기는 하지만, 꿈은 크게 가질수록 좋다고들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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