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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Sep 14. 2018

우리의 여름은 길지 않다

THE BIG ISSUE KOREA 186




“손 카피, 이번 여름휴가는 어디로 가?”


절친한 동료의 물음을 듣고서야 어느덧 휴가철임을 깨달았어요. 이번 달 들어 사무실 곳곳에 며칠씩 자리를 비우는 일이 빈번해져 ‘종일 회의를 하러 간 건가, 무단결근을 한 건가’ 궁금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동안 너무 일에만 몰두하고 살았구나, 나와 똑같이 바빴을 텐데, 그런 와중에도 떠날 계획들은 야무지게 세웠네요. 각자의 여행지에서 각자의 여름을 즐기고 있을 모습을 상상하니 한없이 부러워지지만, 그럼에도 저는 여전히 주춤하고 있습니다.


떠나야 할 이유는 ‘떠나고 싶다’ 딱 한 가지뿐이지만, 떠나지 못할 이유는 매번 수십 가지거든요. 마무리해야 할 보고서가 있어서, 곧 새로 맡게 될 프로젝트가 있어서, 대체할 인력이 없어서. 여러 이유를 떠올리다 보면 대강 잡아둔 휴가 일정조차 차일피일 미루게 되는 것이죠. 사실 주어진 자리를 며칠 비운다고 해서 대단히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닌데. 그럼에도 매번 눈앞에 닥친 일들이 우선이 됩니다. 그렇게 내일만 생각하며 살다 보면, 어느새 한 계절이 훌쩍 지나 있는 건 아주 흔한 일이었어요. "언제 이렇게 벚꽃이 피었지", "언제 이렇게 더워졌지" 하면서 말이에요. 그런 사람이 어디 저 하나뿐일까요. 그랬다면 이 광고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러시아 여행사 'Avionero'의 인쇄광고 (출처 adsoftheworld.com)



저 가느다란 이미지 속에 숨겨진 나라가 어디인지 알아차리셨나요? 랜드 마크의 일부분인 건 알겠는데, 어째서 감칠맛 나게 슬쩍 보여주기만 한 걸까요. 의문을 품으며 옆에 적힌 카피를 읽어보니, 아! 이제야 이 광고를 오롯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요.



“SUMMER IS TOO SHORT. DON’T MISS IT.”



그러네요. 저는 매년 이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산 것 같아요. 사계절 중 여름을 가장 좋아하면서도 실외보다 실내에 머무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았네요. 이번 여름이 아니더라도 나에겐 수많은 여름이 남아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나 봐요. 어김없이 찾아오는 여름이라도 서른둘에 만날 수 있는 여름은 딱 한 번뿐일 텐데 말이죠. 그렇게 몇 번의 여름을 놓쳐버리는 동안, 마음에 툭 하고 걸린 말이 있었습니다. 직업 특성상 밤낮없이 바쁘게 사는 제게 오랜 친구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앞으로 우리에게 남은 여름은 고작 오십 번 정도일 거라고. 우리는 벌써 서른두 번의 여름을 겪었고, 그중 선명히 기억하는 여름은 열 손가락을 넘지 않는 것 같다고.


지나온 여름을 하나 둘 떠올리다 보니, 스물두 살의 기억이 불현듯 떠오릅니다. 그 무렵, 파리에 갈 기회가 있었거든요. 그때도 저는 핑계가 참 많았어요. 위험해서. 낯설어서. 부담이 돼서. 서른둘이 된 지금과는 조금 다른 이유들이었네요. 그럼에도 그 여행을 강행했던 친구들은 아직까지도 그 여름날의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합니다. 그럼 전 벙어리가 되어버리고 말죠. 지금보다 열 살이나 어렸던 그때 파리를 만났더라면, 저는 지금과 조금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까요. 그때 만난 파리가 지금과 조금은 다른 길로 저를 이끌어주었을까요. 길지 않은 여름을 아쉬운 마음으로 보내주어야 할 때마다, 해본 것들보다 해보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아쉬움도 커져갑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저 광고 속 이미지만큼도 경험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어요. 익숙한 자리를 벗어나 보름이 넘는 기간을 머무르는 게 이토록 어려운 일이 되어버릴 줄 몰랐으니까요.


저 카피 한 줄 덕분에 10년 전 여름에 잠시 다녀왔네요. 저 역시 여행에 관련된 광고를 제작한 적이 있지만, 여전히 어렵기만 한 카테고리입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기 위해 백지와 마주할 때마다 나올 수 있는 것들은 이미 다 나왔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취항지를 얼마나 환상적으로 보여줄 것인가’, ‘우리 항공기를 얼마나 근사하게 보여줄 것인가’, 우리는 주로 그런 것들을 놓고 고민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지금 당장 떠나고 싶게 만드는가’인 것 같아요. “당신의 여름을 마음껏 즐겨라”는 말보다 “당신의 여름은 길지 않다”고 말해주는 것처럼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 광고가 참 좋습니다. '즉흥'이라는 단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저를 움직이게 만들었거든요. 열흘 뒤, 저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납니다. 러시아의 여름은 유독 짧다고들 하는데, 운이 좋으면 ‘백야현상’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해요. 밤 10시가 넘어야 해가 지고 새벽 4시가 돼야 해가 뜨는, 기이하고도 근사한 현상이죠. 해가 밝을 땐 주로 회사에 있던 저는,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당황스럽지만, 입가에는 벌써 미소가 지어집니다. 적어도 그곳에 머무는 동안은 이 짧은 여름이 조금은 덜 아쉬울 것 같으니까요.


당신의 올여름은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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