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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Apr 20. 2019

빅모델 촬영이 카피라이터에게 끼치는 영향

어쩌다 보니 사중인격



나의 마지막 아이돌은 동방신기다. 반년 넘게 푹 빠져 살았다. 당시 <미로틱>이라는 신곡으로 가요대상을 몽땅 휩쓴 때였다. 우연히 방청 신청을 했던 음악 프로그램에서 실제로 그들의 노래를 듣곤 반년을 더 허우적댔다. 선물을 보내거나 직접 만나러 가는 열성 팬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이라면 빠짐없이 챙겨봤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돌은 나와 비슷한 또래가 많았는데, 취업을 기점으로 그들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 아이돌을 좋아하기엔 너무 어른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관심이 사라지니 그들에 대해 아는 것도 없어졌다. 그룹 이름을 알고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인원이나 멤버 각자의 이름은 매번 헷갈렸다. 내가 한창 아이돌에 빠져 있을 때, 요즘 가수들은 다 똑같이 생겼다던 어느 선배의 말을 내가 그대로 따라 하고 있었다.



그 무렵 빅 모델과 촬영할 일이 부쩍 많아졌다. 동시에 본격적인 암기 생활이 시작됐다. 촬영을 앞두고 팀장님이 신신당부했다. 절대 멤버들의 이름을 헷갈려선 안 된다, 멤버별 캐릭터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각 멤버의 촬영 분량은 반드시 균등해야 한다 등 세부적인 지시 사항이 내려왔다. 첫 촬영은 7명이나 되는 모 인기 그룹이었다. 나는 그 그룹에서 오직 2명의 이름만 알고 있었다. 그마저도 얼굴과 이름의 매칭이 틀린 상태였다. 촬영 날짜가 정해지고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들이 모두 등장한 사진을 출력해 이름을 매치해보는 것이었다. 머리 스타일도 자주 바뀌는 탓에 인터넷을 통한 확인 작업이 꼭 필요했다. ‘이 친구가 메인 보컬이구나’ ‘아, 이 친구는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 적이 있구나’ 혼자 중얼거리며 암기과목 외우듯 공부했다. 열심히 공부하고 나간 촬영장에선 왠지 모르게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시험공부를 완벽히 마친 학생이 된 것 같았다.



모델 이름 외우기는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광고업계에 있는 한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한 명 한 명 공부하듯 알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 또 하나 생긴다. 멤버 중 누군가에게 푹 빠져버리게 된다는 것. 과거엔 이름도 모르던 멤버에 대해 나도 모르는 사이 술술 읊는 수준이 된다. 행여나 촬영장에서 친절한 모습까지 보게 되면 열성 팬으로 등극하는 건 시간문제. 그렇게 나는 동방신기에서 멈췄던 팬질을 슬금슬금 이어가고 있다. 이대로라면 업계를 떠날 때까지 쭉 아이돌을 좋아할 수 있을 것도 같다.





6년째 글로 먹고사는 카피라이터.

3번째 결혼기념일을 앞둔 아내.

3남매 중 둘째 딸.

7년째 고양이를 모시고 있는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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