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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ranger Oct 14. 2016

공중전

10. 한국에서 돌아오던 날

04.03.2012 (Mar 4, 2012)


한국에 갈 때 가져갈 이민가방을 2단으로 만들어서 겨울옷을 잔뜩 구겨 넣었는데, 아무래도 무게를 초과할 것 같아서 쿤레한테 저울 있냐고 물어봤다. 역시나 쿤레형에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지... 하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내 이름 끝에 제 멋대로 -두를 붙여 부르는 쿤레의 목소리가 들렸다. 쿤레는 내 방에 운동화를 신고 성큼성큼 들어와서는 직접 손으로 이민가방을 들어보면서, 23kg 일리 없다면서 21kg 정도 될 거라는 예언을 하고는 걱정 말라고 하시면서 특유의 신나는 걸음걸이로 퇴장했다. 참으로 멋진 flatmate다.


겨울 외투를 입고 선물 몇 가지를 백팩에 옮기면 이민 가방을 1단으로 줄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 엎어버리고는 다시 짐을 쌌더니 1단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 길로 가방 문을 잠가버리고 짐 싸기를 마쳤다. 어차피 프랑크푸르트 공항까지만 잘 운반하면, 그 뒤로는 그저 기다리면 한국에서는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다. 아무 일 없이 비행기가 잘 뜨고 내려서 한국 땅을 밟기를 바란다.


12.03.2012

늦은 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다. 가족들을 만나니 서로의 마음은 한결 편해졌고, 건강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서 기뻤다. 친구들은 6개월 만에 보는 나를 6년 만에 보는 듯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날 오전 탑승 시간을 2시간 정도 앞두고, 공항 카페에 앉아 아쉬운 시간을 붙잡고 있었다. 

우리, 조금 생각할 시간을 가져볼래? 


독일에서의 긴긴 겨울 동안 추위와 외로움과 싸우고 돌아와 1시간 뒤에 다시 출국장으로 나가는 나에게 남자친구가 말했다. '영화나 드라마도 아니고 도대체 이 장소와 이 타이밍 그리고 이 말은 대체 뭐지.', '지금 장난할 타이밍이 아닌데, 나 곧 보딩 해야 하는데?',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지? 난 뭘 할 수 있지?'...

일련의 생각들은 곧 두려움과 원망스러움으로 바뀌었고, 그때부터 시작해 비행기가 독일에 도착할 때까지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기내식도 마다하고 눈물바람인 나를 옆 자리의 프랑스 할아버지가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결국, 답답함을 느껴 자리에도 못 앉고 화장실 앞에서 서성이는 나에게 찾아와 "무슨 일 있어요?"라고 물었다. 눈물을 멈추고 "보딩 직전에, 남자친구한테 차였어요."라고 대답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프랑스 할아버지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음... 유감이네요. 그냥 마음껏 울어요. 대신, 밥이라도 좀 먹고..." 그 후로 할아버지는 걱정을 거두고 내가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나는 내 마음대로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고, 남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어서 소리도 내지 않고 계속해서 울었다. 나를 차 버린 사람에게 전화를 할 수도, 욕을 할 수도, 차분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대화를 할 수도 없는 비행기 안에서 누군가 내 손 발을 묶어둔 것처럼 느껴졌다. 11시간이나 되는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속수무책으로 슬픔이라는 감정에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10시간을 넘게 공중에서 울고 나니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았다. 정신이 맑아지면서 봄기운이 느껴지는 프랑크푸르트의 바람에 왠지 현실과 단절된 것 같아 차라리 좋기까지 했다.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하니 11시가 넘었다. 7시만 넘어도 상점들이 모두 문을 닫아서 술집이나 대형마트에 가는 사람 말고는 인적이 드문 동네이다. 더군다나 내가 사는 곳의 지하철역은 늦은 시간 일 수록 인적이 드물고, 적막하다. 고민 끝에 쿤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11시 넘어서 도착해서 그런데, 지하철역으로 잠시만 와줄 수 있어? 미안해.' 
'오! 너 왔구나! 한국에서 잘 있었지? 가족들이랑 친구들 만나서 좋았지?'
사실, 나 조금 문제가 있어서 힘들어. 만나면 말해줄게!    


멀리서부터 떠들썩하게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면서 쿤레형이 마중을 나와줬다. 겨울옷 대신에 들고 온 짐들을 보면서 너보다 큰 짐을 또 끌고 왔냐고 놀려댔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안부를 묻는다. 내가 쉽게 말하지 못하자, 갑자기 진지해진 쿤레는 일단 너무 피곤할 테니 집으로 빨리 가자고 재촉했다. 


'I broke up with my boyfriend just before boarding.'
'What? you kicked him??'
'Nope. I didn't'

다시 그 사람에게 연락해봤어?, 왜 헤어지 쟤?, 한국에 있는 동안 가만히 있다가 공항에서 그랬다고? 등등 쿤레의 쏟아지는 질문과 걱정에 대답해주었다. 쿤레는 본인의 'Don't worry, Be happy.' 철학을 내세우면서 한국에 돌아가면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했다. 여기 있는 동안은 그런 나쁜 X은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보는 건 어떠냐며 웃었다. 나는 도대체 슬픔이라는 감정이 나이지리아에 있긴 한 건지 궁금해졌다. 그러지 않고서야 쿤레는 이런 상황에서까지 웃고 있다니...


2016.10.14 금


그 날, 쿤레가 지하철역까지 마중을 나와 주어서 독일이었지만, 다시 집에 온 느낌을 받았다. 너무나도 힘들었고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공중전을 치른 하루였다. 그리고 동시에 단 한 사람이라도 나를 기다려주고,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 지를 깨달은 날이었다. 


쿤레는 나의 플랫 메이트였다. 나는 6명이 사는 플랫에서 유일한 여학생 거주자였고, 내 앞 방에는 나이지리아에서 온 쿤레, 옆 방에는 중국인 잉, 그리고 바젤에서 온 다니엘, 아일랜드인, 슬로바키아인과 함께 지냈다. 주로 쿤레와 잉과 함께 장도 보고, 주방도 함께 쓰면서 교환학생에서의 대부분의 일상 에피소드를 공유했다. 쿤레와 잉은 geographic information system(GIS)를 전공하는 석사 학생들이었다. 교과서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단어인 GIS가 전공이라니 신기하기도 하고, 밤새 과제를 하는 모습에 나라를 불문하고 공대생들이 얼마나 힘들게 공부하는지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재밌게도 나도 4년이 지난 지금은 그들처럼 GIS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프트웨어를 공부하고 프로그래머가 되었다. 아마도 나도 모르는 사이 그 둘의 모습을 보며 호기심을 품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쿤레는 내가 프로그래밍을 배운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도, 여전히 독일에 있지만 응원해 주었다. 그는 나의 첫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나라 출신의 친구이자, 흥이 넘치고 (설거지를 할 때 항상 노래하고 춤을 췄다.) 항상 happy 한 친구이다. 나에게 힘든 일이 있을 때나, 심각하게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도 '하쿠나 마타타, Don't worry, Be happy'를 불러서 조금은 화가 날 정도로 심각해지는 법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받을 수 있는 유산인 특유의 '긍정 에너지'와 '낙천주의'때문이었던 것 같다. 


얼마 전, 쿤레와 연락이 닿았다.

'나 내년에 한국에 놀러 갈 계획이야. 너 만날 수 있어?!'
'한국에 오는데 날 안 보려고 했어? 당연히 봐야지. 한국은 그렇게 넓은 나라는 아냐ㅋㅋㅋ'    

4년이 지났는데도 나를 기억해주고, 굳이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여행국가 목록으로 고려해 준 친구의 마음의 온도가 독일에서 한국까지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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