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라고요? 전 육아휴직을 원하는데요

사내 첫 번째 육아휴직에 도전

by 세실리아

나는 지방에서 서울로 KTX 타고 통근하는 ‘장거리 통근러’였다. 결혼하며 남편 연고지에 살게 됐는데, KTX로 35분이면 서울역에 도착하니 출근은 그다지 어려울 게 없었다. “KTX 타고 회사 다닌다고?”라며 다들 놀랐지만, 대학 때 서울에서 서울로 통학하는데 지하철 45분 소요되었던 걸 고려하면 통근 못할 거리는 아니었다.


문제는 야근이었다. 회사에서 집으로 가는 KTX 막차 시간은 11시 30분인데, 막차를 타려면 회사에서 11시에는 나서야 했다. 하지만 11시 넘어 퇴근해야 하는 날이 많았다. 막차를 놓쳐 회사 근처인 친정에서 자거나, 남편이 회사에 데리러 오는 일도 종종 있었다. 홍보회사 특성상 ‘클라이언트 운’이라는 게 있는데 합리적인 클라이언트를 만나면 좋지만, 그 반대인 경우도 많다. 난 복직 후 다들 꺼리는 브랜드를 담당하게 됐고, 매일 밤 야근해야 할 운명이었다. 내가 지금 퇴사하거나 휴직하지 않는 한 이 클라이언트를 벗어날 수 없을 거 같았다.



사내 첫 번째 육아휴직에 도전

계속되는 야근에 나도 남편도 지쳐가던 어느 날, 직속 상사인 부장님 자리에 찾아가 “부장님 저 남은 육아휴직 쓰려고요”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그래. 너 요즘 너무 힘들어 보여. 밤만 되면 얼굴이 잿빛이다. 아무리 KTX로 가깝다고 해도 서울까지 다니기 너무 피곤할 거 같아”라며 “그리고 애 키우면서 이 클라이언트 하려면 답이 없어”라고 했다.



며칠 후, 부장은 인사팀과 이야기를 나누더니 나에게 제안했다. “그럼 퇴사했다가 애 키우고 다시 오는 건 어때? 어차피 네가 다시 온다고 할 때 회사에서 못 오게 할 리는 없으니 그냥 중간에 퇴직금 한번 정산한다고 생각하면 될 거 같아”라고 했다. 아마 사측에서 제시한 의견일 거다.


난 싫었다. 퇴사했다가 다시 재입사하라고? 육아휴직을 쓰면 회사 복귀가 내 손에 달린 반면, 저 제안대로라면 나의 복귀는 회사의 손에 달렸다. 게다가 그렇게 할 경우 나라에서 지급되는 육아휴직 수당도 받을 수 없다. 월 100만 원이니, 열 달이면 적은 돈이 아니다.



육아휴직을 받기 위한 길고 긴 여정

의아했다. 육아휴직을 한다고 해도 육아휴직 급여는 정부에서 주는데, 왜 이리 육아휴직 허가를 꺼리는 걸까? 이유는 간단했다. 회사에서는 ‘육아휴직 선례’를 만들고 싶지 않았던 거다.


당시 회사엔 ‘애 없는 기혼’이 많았다. 사측에선 가임 여성을 리스크로 생각했다. “네가 육아휴직 가면 앞으로 애 낫고 다들 줄줄이 육아휴직 가려고 할 텐데 그러면 감당 못한다”는 게 회사 의견이었다. 회사 입장이 이해 안 가는 건 아니다. 회사에서 생각하는 가임 여성은 모두 과차장급인데, 홍보회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과차장급은 업계에서든 사내에서든 귀한 인력이기 때문이다.


한창 일 많이 할 그 인력이 15개월 자리를 비우면 그 자리를 대체할 사람이 마땅찮고, 새로 사람을 뽑자니 기존 직원 복직 후 잉여 인력에 대한 인건비가 부담스러울 거다. 그렇다고 그 시기에 계약직을 뽑자니 과차장급 인력은 다른 회사에 정규직으로 가지 굳이 이 회사에 계약직으로 오지 않는다.


육아휴직을 승인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3월 초에 육아휴직 이야기를 처음 꺼냈는데, 5월 말이 되어서야 겨우 육아휴직을 개시할 수 있었다.



내가 첫 육아휴직자가 아니라고?

긴 시간 끝에 드디어 ‘사내 첫 육아휴직’을 쟁취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난 두 번째 육아 휴직자였다. 나보다 먼저 출산휴가에 들어간 팀장이 있었는데 육아휴직 중이었던 것이다. 그 팀장이 육아휴직 중이라더라, 아니다 퇴사한 거다 등등 사내에 이런저런 풍문이 돌았는데, 다들 자기 일에 바쁘니 이내 잊어버렸고 회사에서는 ‘육아휴직이 아닌 척’했다. 회사에서는 육아휴직 선례를 남기지 않게 위해 쉬쉬했던 거다.

육아휴직을 승인받던 날 “육아휴직이라고 너무 소문내고 다니지 말아라”는 당부를 들으며 드디어 육아휴직자가 됐다. (그다지 크지 않은 규모의 회사인데, 소문내고 말게 뭐가 있나!)


그렇게 난 ‘두 번째 선례’를 남겼다. 쉽지 않은 승인이었지만, 육아휴직을 쓰게 해 준 회사에 진심으로 고마웠다. 불과 3~4년 전이지만, ‘육아휴직을 승인했다’는 말보다는 ‘육아휴직을 쓰게 해 줬다’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사내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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