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같은 회사 싫어요
가족 같은 회사=가'족' 같은 회사라는 유머가 등장하기 전부터 난 가족 같은 회사를 싫어했다.
'가족 같은 회사'를 표방하는 첫 회사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사측에서 켕기는 게 있을 때 가족을 운운하기 때문이다. 직원들의 권리에 대해선 '우린 가족이니까'라며 이해를 바라는 반면, 직장인의 의무를 따질 땐 칼같이 '여기는 회사'라는 걸 강조한다.
창립기념일, 워크숍, 회식 등 회사의 크고 작은 일마다 늘 동행하는 대표 지인이 있었다. 막역한 친구 사이 같았는데, 그래도 의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표가 옆 팀 직원에게 "OO는 한 달에 얼마 저금하니?" 물었다.
신입사원이었던 그는 "엄마가 저금해주세요. 한 달에 XX만원이요"라고 하니 "그 돈을 적금하니?"라고 물었고, 그렇다고 했다.
그때부터 뭔가 짜 맞춘 듯 연극 같은 대화가 오갔다(연극 같다고 한 이유는 뭔가 사전에 협의를 해두고 대사를 치는 거 같았기 때문이다).
대표 - 글쎄 OO이는 한 달에 XX만원을 적금으로만 넣는대.
대표 지인 - 어머 적금으로만? 아이고 그 큰돈을 적금에 묶어둔다고? 너무 아깝다.
대표 - 그러게 말이야. 난 네가 소개해줬던 상품 가입해서 얼마나 이율 봤었지?
대표 지인 - 재미 좋았지. 그런 거 해야 재미 보지 XX만원을 다 적금 넣다니 내가 다 아깝다.
그러더니 즉흥적인 척하면서 '너희에게 재테크 교육이 필요하다'며 신입사원들을 그 지인과 함께 회사 근처 카페로 내보냈다. 알고 보니 대표 지인은 변액보험을 판매하는 보험사 직원이었다.
카페에 앉아 신입사원들은 커피를 홀짝이며 적금, 펀드, 변액 차이에 대해서 설명을 들었는데 '기승전 변액 가입'이었다. 대부분의 보험영업이 그렇듯 듣고 나면 저걸 가입해야만 재테크의 기본을 실천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하지만 집에와서 검색해보니 변액의 장점만 설명하고 단점은 전혀 설명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고, 가입 생각이 사라졌다.
대표의 타깃으로 정해져서 'XX만원이나 되는 돈을 아깝게 적금으로만 넣는 아이'도 반응이 시큰둥했다. "우리가 가족 같은 회사라고는 하지만 가족은 아니잖아요? 왜 직원의 저금액을 궁금해하고, 그 돈을 이래라저래라 하는지 모르겠어요"라며 불쾌한 마음을 내게 토로했다.
맞는 말이다. '가족 같은 회사'라는 말도 싫은데, 진짜 가족도 아닌 마당에 왜 저러는지.. 그 직원도 갑자기 물으니 얼떨결에 저금액을 대답하고선 후회하는 거 같았다. 전 직원 다 들리게 한 달에 얼마 저금하는지 떠들어대는데 누가 좋겠는가.
'가족 같아서'라는 핑계 뒤에는 항상 음흉한 이유가 따라붙기 마련이다. 얼마 저금하는지 궁금했던 건 가족같아서가 아니라 지인이 판매하는 보험상품에 가입할 것을 종용하기 위해서였던 것 처럼.
대표의 지인은 여러모로 특이한 포지션이었다. 신입사원들이 다 같이 모여 발표를 해야 하는 날 임원진들 옆에 의자를 놓고 같이 앉아 코멘트를 하기도 하고(전공자 아님, 관련 업계 이력 없음) 회식 날 동행해 같이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워크숍이나 송년회도 함께 했다.
회식하다가 일이 남아서 동료 한 명과 같이 먼저 사무실에 들어왔던 날, 많이 못 먹고 가서 어쩌냐며 음식을 사서 갖다 주는데, 평소에도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그날이야말로 진짜 이상했다. 회사 상사도 이렇게는 안 챙기는데 생판 남이 이렇게 챙겨주는 건 모종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옷차림도 좋고 아주 멀끔하게 생긴 분이 밤 열 시에 남의 회사 직원들의 간식을 챙겨주는 게 이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친절에 넘어가서 10년 이상 유지해야 하는 상품에 가입한 동료도 있었고, 가입 안 한 사람은 답답하다는듯한 눈초리를 감당해야 했다.
콩알만 한 월급 주면서 그 마저도 지인의 보험상품에 가입시키려하다니 그 또한 권력남용이자 갑질이다.
이후에도 종종 교묘하게 변액가입을 종용하길래 집에 와서 변액에 대해 검색해봤었다. 대표 지인(보험 판매인)은 적금보다 훨씬 높은 이율만을 강조했지만, 사업비에 대한 설명은 전무했다. 사업비의 존재를 알고 나서 그다음부터 변액 가입을 한 귀로 듣고 흘릴 수 있었다.
[변액 보험에 대한 TMI]
- 박주민의원(더불어민주당)이 발표한 '생명보험사별 변액보험 운용현황'자료에 따르면 생명보험사 22개의 사업비 비중 평균을 내보면 11.5%가량
- 원금에서 10% 이상이 사업비로 먼저 떼이고 차액만 투자가 되는 셈. 고로 투자하기 전에 10% 이상의 손실을 안고 투자하는 것 (100만 원을 투자한다면 10만 원 이상은 사업비로 먼저 떼이고, 90만 원 이하가 원금이 됨)
- 생명보험사에서는 '7년 이상만 유지하면 원금이 보장된다'라고 하지만, 채이배(국민의당)의원이 발표한 '각 보험회사별 변액연금 해지환급금 추정액 현황'에 따르면 25개 변액보험 상품 중 22개는 납입기간 9년이 지났음에도 해지 시 손실이 발생
출처 - 투자자는 왜 변액보험의 ‘변’자만 들어도 발끈할까
안타깝게도 오랜 기간 신뢰를 쌓는 척 시간을 함께 했던 대표 지인의 말을 믿고 큰돈을 가입했다가 손실을 크게 본 직원도 있다. 당시만 하더라도 저축은행 예금자 보호가 되는 적금 이율이 6.5% 이상이었다. 하지만 대표와 대표 지인은 적금보다 훨씬 높은 이율만 어필하면서 미리 준비해둔 스크립트 같은 대사를 핑퐁 하며 경우엔 적금을 드는 건 어리석은 것처럼 푸시했다. 과도한 친절을 경계하고 이율 6.6%였던 적금을 들었던 게 다행이다.
금융 상품에 가입하면서 그에 대한 정보를 잘 찾아보는 것도 가입자의 몫이고, 가입을 결정하고 최종 서명을 했으니 가입자의 책임인 건 맞다. 하지만 저 회사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일들은 문제라고 본다. 대표라는 지위를 지용해 근무 시간에 지인 영업의 장을 만들어주고, 개개인의 재테크 방식에 크게 관여했기 때문이다. 작은 회사에서 대표가 바람잡이 하면 넘어가는 신입사원이 있기 마련이다.
이후 다른 회사를 다닐 때에도 보험 영업은 종종 있었다. 요즘은 일정 규모 이상의 회사는 성희롱 교육이 의무사항이다. 회사에서는 자체적으로 성희롱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힘드니 외부에 맡기는데, 일부는 '후원사'라는 이름으로 무료로 성희롱 교육을 제공한다. 이유는 프로그램을 성희롱교육+재테크교육으로 구성하면서 재테크 교육 중 보험상품을 판매하기 위해서다.
이 또한 문제점은 있지만 적어도 회사 상사들이 보험 상품 가입에 관여하는 게 아니니 개인 판단의 몫이다. 내 첫 회사에서의 기억이 안 좋게 남아있는 이유는 일상적인 대화 인척 '얼마 적금하니' 물어보면서 놀라는 척 연기를 하고(ex. 어머 그 돈을 아깝게 적금에 묶어둔단 말이야?) 옆에 있던 보험판매사가 자연스레 재테크 교육을 해주겠다고 나서는 게 바람잡이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 또한 어떤 의미에서 가스라이팅아닌가.
그 회사는 지금도 그러고 있을까? 여전히 부모가 자식의 재테크를 염려하는 척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결론 - 가족 같은 회사는 없다. '가족 같은'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켕기는 게 있는 것. 진짜 부모라면 그런 회사에 안 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