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선 일만 합시다
어느 날 대표가 집에서 반찬을 싸왔다. 어차피 사 먹으면 조미료 범벅 아니냐며 이렇게 건강한 집밥을 먹으면 얼마나 좋냐고 했다. 곧이어 회사에 쓰던 밥솥이 들어오고 밥그릇, 숟가락 등이 들어오면서 사무실이 산으로 갔다.
막 창업한 그 회사는 대표의 지인들이 임원으로 있었고, 알음알음 지내던 사람들이 프리랜서 형식으로 와서 일을 했다. 신입사원은 나뿐이었다.
나중에 사세가 확장되면서 사원 몇 명이 입사했는데, 막내급 사원들끼리 번갈아가면서 설거지를 했다. 너무 짜증 나고 싫었는데, 나 혼자 나가서 밥 먹겠다고 하는 게 유별나 보일까 봐 참았다. 다들 티를 안 내니, 나만 싫어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신입사원은 점심시간이 되기 전이면 법카를 들고 마트 반찬 코너를 기웃거리기도 했고, 반찬으로 파는 생선구이 등을 사러 다니기도 했다. 3개 만원 하는 반찬을 사 와서 락앤락에 담는 것도 신입의 몫이었다.
그러면서 종종 '우리 회사는 중식 제공'이라는 말을 했다.
가끔 시켜먹을 때도 궁상맞았다. 5명인데, 메뉴를 4개만 시키고 공깃밥을 추가했다. 다 같이 먹으면 이렇게 해야 양이 딱 맞다며 그런 식으로 주문했다. 이 사람 저 사람 숟가락이 마구 들어가는 뚝배기 속 찌개를 먹는 게 너무 싫었다. 육개장을 시켜먹었던 어느 날(아마 3명이었는데 2개를 시켰던 걸로 기억한다) 대표 옆에 앉아있던 이사가 내게 초등학생도 아닌데 파는 왜 자꾸 빼고 먹느냐며 잔소리를 하고, 대표는 함께 딸려온 콩비지가 얼마나 맛있는데 안 먹냐며 한 숟가락 먹어보라고 권하는데 마음 속으로 한숨이 났다.
초년생인데 애매하게 퇴사하면 이력서가 더러워질까 봐 1년만 참자는 생각으로 다녔었는데, 점심시간마다 고역이었다. 어느 날은 대표가 3분 카레 두어 개를 락앤락에 담아 데웠다. 여러 사람 숟가락 닿는 게 싫어서 카레는 먹지 않았다. 다들 잘 먹는 걸 보면 나만 유난 떠나 싶은 생각이 몰려오기도 했다.
카레는 바닥이 보일 듯 말듯한 정도로 남았고, 설거지하려고 세면대에 가져가려는데 대표가 "그거 다음에 먹어도 될 텐데? 냉장고에 넣어둬"하는데 진심 경악했다. 냉장고에 넣을 만큼 양이 남지도 않았을뿐더러 여러 명이 숟가락 대고 먹은 카레를 왜 보관할 생각을 하는지. 게다가 나중에 저걸 도대체 누가 먹는다고.
순간 당황했는데, 옆 팀 신입사원이 나에게 조용히 "버려요. 이거 너무 비위생적이잖아요. 어차피 냉장고에 넣으면 아무도 안 먹고, 우리가 치워야 해요"라고 했다. 이 꼴을 나만 싫어하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어느 날 회사에 손님이 왔다. 내게 같이 식사를 하자고 하길래 중식당에 갔다. 각자 식사메뉴를 시키고, 다 같이 먹을 메뉴로 춘권을 시켰다.
식사를 먹고 나니 춘권 하나가 남았다. 돌돌 말린 춘권은 검지 손가락 하나 크기였다. 대표는 하나 남은 춘권이 아까웠는지 나보고 먹으라고 하길래 너무 배불러서 더 이상 먹을 수 없다고 했다. 그랬더니 이걸 포장해가서 옆 팀 막내를 주잖다. 이걸? 춘권 세트도 아니고 달랑 이 하나를? 게다가 새 음식도 아니고, 먹다 남은 걸 주자고?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손가락만 한 춘권 하나를 주방에 포장해달라고 요청하기엔 민망했는지, 갑자기 휴지 한 장을 슬쩍 건네더니 이걸로 포장하란다.
작은 회사의 구조적인 문제도 있지만, 아주 작은 거에도 쪼잔한 대표가 '콩알만큼 작은 회사'를 더 콩알만 하게 만들고 있었다.
점심시간마다 스트레스 받아서 가급적 점심 약속을 잡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근무하는 친구들과 시간을 맞춰 점심시간에 맛있는 걸 먹고 커피도 마시니 너무 좋았다.
물론 대표가 매일 저렇게 궁상맞게만 굴었던 건 아니다.
종종 나가서 점심도 사주고, 커피도 사주고, 회식 명목으로 나름 거한 저녁을 사주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단언컨대, '내돈내산' 따로 먹는 점심이 훨씬 좋았다.
근로기준법 제54조에 따르면 근로시간의 길이에 따른 휴게시간을 정하고 있다. 근무시간 도중 1시간의 식사시간은 휴게시간으로 간주된다.
근로기준법 제54조(휴게)
① 사용자는 근로시간이 4시간인 경우에는 30분 이상, 8시간인 경우에는 1시간 이상의 휴게시간을 근로시간 도중에 주어야 한다.
② 휴게시간은 근로자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점심시간 1시간 동안 밥 짓고, 설거지했던 그 시기는 내 인생의 흑역사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