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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은 Nov 04. 2019

슬픔의 뉴트로

“내 어릴 적 기억이 추억 삼아지고 유행되는 게 왜 이렇게 슬픈지 모르겠구나.”


  촌스러운 게 귀여운 ‘비락우유 컵’이 잔뜩 들어있다는 시골 찬장 얘기에 눈을 반짝이는 20대에게, 슬픈 표정을 지어 보이는 50대. 그때는 컵에 한눈팔려, 그가 느끼는 슬픔의 이유를 같이 궁리해주지 못했으나 이제 와 짐작해보련다. 그때의 20대인 당신이 누렸던 찬란한 패션이, 뜨거운 문화가 지금에 와서 고정되고 박제돼 ‘옛것’의 딱지가 붙은 게 슬펐을 것이다. 


  그러나, 또 감히 대꾸해보건대 당신의 행복이 추억 삼아지는 것은 ‘슬픔’의 딱지를 붙이기엔 다소 사소한 것 같다. 그리고, 당신의 걱정과는 달리 당신의 행복은 박제되지 않고, 새로운 문화로 향유되며, 열렬히 재현되고 있으니 걱정 마시라 덧붙이겠다. 행복한 기억이 유행이 돼 슬픈 사람은, 아픈 기억이 유행이 되지 않는 데에는 통곡해야 하지 않을까요,라는 질문까지도. 


  영화 <미스틱 리버>에서 아주 운 나쁘게 납치당한 아이는 아주 운 나쁘게 성폭행을 당한다. 납치될 때 함께 놀고 있었던 다른 두 명의 아이는 나중에 커서 종종 그날 당한 게 나였으면 어땠을까, 하며 피해자의 고통을 지레짐작한다. 피해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가 겪은 고통은 낙인이 되어 그의 주변을 맴돌고, 과거는 논리적인 설명이 되어 그의 현재를 뒷받침한다. 고통은 그 자체만으로도 고통스러워서 쉽게 덮어진다. 암묵적 고통. 당사자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행복이 재현되는 동안에도 고통은 다시 불러일으킬 수 없다. 고통의 재현은 그토록 금기시된다. 


  행복이 재현된다면, 고통은 재연될 뿐이다. 묵묵히 숨어있다가 똑같은 방식으로 불쑥 피어난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유가족 모임이 아니고서는 함부로 ‘그 이야기’를 꺼낼 수 없다고 한다. 왜 그런 얘길 꺼내서 분위기를 우울하게 하느냐고, 고통을 모르는 이들이 침묵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반면 고통을 겪은 이는 다음 고통을 겪은 이에게 미안해한다. 세월호 유가족들을 찾아온 대구 지하철 참사 유가족들이 그랬다고 한다. 그때 자기네가 법도 만들고 끝까지 대처했으면 이런 재난이 다시없었을 텐데,라고 말이다. 고통받은 자만이 고통받고, 아픈 사람들끼리 사과하는 사회에서, 어쩌면 슬픔의 재연은 필연인지도 모른다. 


  시골 찬장에 된장처럼 묵혀둔 글라스가 소환되듯이, 아픔도 꾸준히 소환되어야 한다. 행복한 기억이 노래로, 이야기로, 연극으로 재현되는 것처럼 아픔도 일상에서 재현되어야 한다. 그것은 고통받은 자들의 권리를 존중하는 방법이 될 테다. 묵은 아픔이 환대받기 전까지, 아픔의 연기는 언제 어디서든 피어오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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