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봄의 기억
"저 차 한 잔만 주세요. 제가 그 방으로 갈게요."
작년 이맘때쯤이었다. 직장 상사와 연구실에서 단둘이 티타임을 갖었다. 내가 입사했을 때 같은 팀으로 만난 그녀는 나보다 띠동갑 위의 상사였는데, 처음을 함께 했다는 이유인지 내게는 각별한 정이 있는 분이었다. 그 후로 긴 시간이 지나 다른 팀이지만 같은 연구사업 안에서 다시 만난 우리는 제법 골치아픈 과제로 서로 스트레스가 쌓인 상태였다.
그녀가 향기롭게 커피를 내렸다. 커피가 여과지를 통해 느리게 내려지는 동안 우리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가 불현듯 말했다.
"아이고, 이 과제가 뭐라고 이렇게 꽃다운 나이에..."
생각지도 못한 '꽃다운 나이'라는 말에 나는 웃음이 터졌다.
나의 20대를 기억하는 그녀였다. 아무래도 입사시절의 생기를 조금 잃었을테고, 노련해진 만큼 풋풋함이 사라졌을 것이었다. 입사시절 우리에겐 점심시간이면 삼청동에 내린 계절을 감상할 낭만이 있었다. 그후로 이전을 하고 부서가 달라지면서 층이 멀어졌고, 과중되는 업무에 점차 얼굴 마주칠 기회가 줄어들면서 그렇게 시간은 훌쩍 흘러버렸다. 그리고 수년만에 다시 같은 과제로 만났을 때 우리는 '어쩜, 미모는 여전하다, 나이를 안 먹는 것 같다'며 얼마든지 속아줄 수 있는 즐거운 빈말을 주고 받았지만 분명 우린 그만큼 나이가 들었고 전보다 조금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나에게 '꽃다운 나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30대가 꽃답지 말라는 법도 없었지만 서른 중반의 나이에 좀처럼 들을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웃음이 터졌다.
"에이, 솔직히 꽃다울 나이는 지났죠."
"무슨 소리야, 다 그렇게 졌다가 다시 피고 또 지고 하는거야."
진지한 회의시간에도 꼭 개그를 치고야 마는 성격인 유쾌한 그녀의 말에 나는 또한번 웃었다.
"앗, 지당하신 말씀이네요."
생각해보니 계절도 돌고 돌아 이렇게 다시 봄이 오는데, 나라는 꽃이라고 어디 한 번만 피고 말까. 단지 올해의 봄이 작년의 봄과 같은 것이 아닌 것처럼 나또한 다른 모습으로 새로운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일 뿐.
느긋하게 퍼지는 커피향이 방안을 가득 채울 즈음 우리는 찻잔을 들었다. 커피향이 좋은 탓인지 꽃다운 이야기를 해서인지 그날의 수다가 참 향긋했다.